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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통 키신저가 본 ‘한국전쟁’의 원인은[김상운의 빽투더퓨처]

입력 | 2023-12-25 11:00:00

[13] 키신저와 국제정치 中




미국 현실주의 외교의 거두로 미중 데탕트 주역인 헨리 키신저(1923~2023)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봤을까요. 미국과 중국이 한국전쟁의 주요 교전국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미국은 물론 중국 외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의 시각이 더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키신저 별세를 계기로 그의 현실주의 외교가 학문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이 현실정치에 끼친 영향을 분석한 12회(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31210/122564144/1)에 이어 이번에는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전쟁의 원인과 배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미국 외교 특유의 도덕주의적 원칙주의에 주목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키신저의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보면 전쟁 당사자였던 미국의 움직임이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행태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그럼, 한국전쟁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어야 하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로 시계를 돌려보겠습니다(키신저의 대표작 ‘Diplomacy(1994)’를 비롯한 국내외 문헌들을 참고했습니다.)


동지에서 적으로…. 미국의 소련관(觀) 변화

1988년 방한한 헨리 키신저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접견하고 있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 당시 적국이던 중국과 수교를 추진한 공통점을 가졌다. 유튜브 화면 캡처

2차 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 미국에서는 나치에 맞서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운 전시 동맹 소련의 실체를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1945년 2월 얄타회담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나치 패망 후에도 유럽에서 소련과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죠. 아직 일본이 무너지기 전이었기에 극동지역에서 소련의 군사적 도움이 필요한 현실적인 이유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식 이상주의와 도덕 원칙에 따라 전후 문제를 처리하고자 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통적인 세력균형 외교를 거부하고, 집단안보로 평화를 보장하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반면 여우처럼 눈치가 빨랐던 처칠 수상은 팽창주의 욕구로 들끓던 스탈린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죠.

처칠은 소련이 나치의 군사적 압박에서 완전히 해방되기 전에 중부 및 동부유럽에서 자유진영의 세력권을 공고히 함으로써 스탈린의 야욕을 꺾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처칠의 주장이 소련과의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면서 이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처칠의 우려는 곧 현실화하죠. 스탈린이 동유럽 적화(赤化)를 목표로 헝가리, 불가리아, 폴란드 등에서 잇따라 공산주의 독재정권 수립에 나선 겁니다. 소련은 인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민족주의자 등 좌우를 망라한 연립정권을 세운 뒤 테러 등을 통해 반공 세력을 제거 혹은 흡수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공산당 특유의 기만전술로 이른바 ‘사이비 연립단계’를 거쳐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세운 겁니다(시리즈 4회 참고: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813/120687443/1)

여기에 스탈린이 독소전쟁과 비효율적인 사회주의 체제로 취약해진 국력을 가리기 위해 소련의 군사력을 과대 포장하며 공세적인 자세를 취한 것도 미국의 위협인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스탈린의 허장성세는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적으로 보유한 상황에서도 계속되죠. 1945년 6월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이 핵무기 개발 사실을 넌지시 알리자, 스탈린은 “개발 소식을 기쁘게 생각하며 핵무기가 일본에 쓰이기를 바란다”며 별것 아닌 것처럼 응수합니다.

하지만 사실 소련은 미국, 영국 내 스파이들을 통해 미국의 핵무기 개발 상황을 몰래 정탐하며 자체 핵개발에 전력투구하는 등 바싹 긴장한 상태였죠. 미국에 꿀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중부 및 동부유럽에서 세력권을 양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센 척’을 한 겁니다.

서구 독점 자본주의 국가들이 이권을 둘러싸고 서로 전쟁(3차 세계대전)을 벌일 거라고 본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관이 서구와 대결 구도를 형성한 배경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문제는 미국이 스탈린의 ‘센 척’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는 겁니다(미국은 전략폭격을 빼면 유럽대륙에서 소련의 육군력이 서방보다 우세하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죠)


냉전시대 연 ‘봉쇄정책’의 기원

냉전시대 미국 봉쇄정책을 입안한 조지 케넌(오른쪽 사진)이 1946년 2월 미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 ‘The long telegram’의 첫 페이지(왼쪽). 위키피디아

스탈린의 공세적인 태도에 당황한 미국에서는 소련이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나치처럼 또 하나의 적인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이때 소련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주니어 외교관의 보고서 한 통이 워싱턴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죠. 미국 대소련 봉쇄정책의 시발탄이 된 조지 케넌(George Kennan)의 1946년 2월 보고서 ‘the long telegram(긴 전보)’입니다.

케넌은 제정시대까지 소급해 러시아의 역사 전통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보고서를 시작합니다. 그는 러시아가 유럽부터 중앙, 극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끊임없이 추구한 이유를 몽골족 등 아시아 유목민의 침략에 시달린 농경민 특유의 불안에서 찾았습니다. 제정 러시아에서 귀족 등 엘리트 집단이 프랑스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한 데에서 알 수 있듯 서유럽보다 근대화에 뒤처진 열등감도 러시아의 불안을 더한 요소였죠.

또 거대 인구를 통제하며 전제 군주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외적 위협을 끊임없이 조장한 행태가 소련의 사회주의 독재체제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고 봤습니다. 이에 따라 소련의 팽창주의는 내부 체제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미국의 회유가 먹힐 수 없다는 게 케넌이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자유 민주주의 질서에 뿌리를 박고 있는 미국은 철학이나 목적에서 소련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본 거죠. 케넌은 미국이 소련과의 긴 투쟁에 나설 채비를 갖춰야한다며 봉쇄정책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키신저는 케넌의 견해가 세력균형을 통한 공존이 아닌, 자유를 억압하는 소련체제 자체의 붕괴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전통적인 이상주의 외교 원칙과 잘 맞는다고 평가합니다. 어찌 보면 이런 행태는 과거 미국이 핵무기로 ‘벼랑 끝 외교’에 나선 북한에 대해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검토한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타협은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는 식의 미국 특유의 외교원칙이랄까요.

케넌의 주창으로 트루먼 행정부가 채택한 봉쇄정책을 놓고 미국 내에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됩니다. 미국 언론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 등 현실주의자들은 봉쇄정책이 시간을 끌면서 미국의 국력을 서서히 소진시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특히 소련의 도발로 미국이 멀리 떨어진 주변부에 연루돼 국력을 낭비할 수 있다고 우려했죠. 사실 이런 그의 주장은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으로 어느 정도 현실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리프먼은 미국이 주변부에서 힘을 빼지 말고, 미국의 핵심 이익이 걸린 유럽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키신저는 이런 시각이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원칙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평가합니다. 리프먼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관점에서 지정학적 이익이 상대적으로 낮은 한반도에 개입한 것은 국력 낭비에 불과합니다. 현재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도 리프먼의 관점에선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겠죠.

처칠은 봉쇄정책의 전반적인 취지는 이해했지만 그 방법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무한정 시간을 보낼 게 아니라, 미소 간 군사력 격차가 극대화된 시점(2차대전 종전 직후)에 미국이 대소 견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는 소련이 경제적으로 안정화되고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면 미소 간 격차가 좁혀져 갈수록 서방의 협상력이 낮아질 거라고 봤습니다.

키신저는 케넌의 소련 인식이 정확했다고 봤지만, 방법론에 있어서는 처칠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리프먼의 예견대로 봉쇄정책이 미국의 국력을 소진시킨 측면이 있고, 특히 베트남전쟁에 와서는 국내 여론 분열과 미국의 안보 보장에 대한 신뢰성을 실추시켰다는 겁니다.


키신저가 본 한국전쟁의 원인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당시 사다리를 타고 해안에 발을 내딛는 미 해병대원들. 가장 선두에 선 이는 로페즈 중위로 이날 부하들을 구하기 위해 수류탄을 끌어안고 전사했다. 동아일보DB

키신저는 미국과 공산권의 상호 오인(misperception)이 서로 얽히면서 냉전시대 첫 열전인 한국전쟁이 발발했다고 보았습니다. 우선 소련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의 승리를 사실상 묵인한 미국이 상대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떨어지는 한반도 분쟁에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봤습니다. 키신저는 “미국에게는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도덕적 의무가 전략적 이익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소련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스탈린의 맞상대였던 트루먼은 철저한 반공주의와 미국 예외주의의 도덕 원칙으로 무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상원의원 시절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만약 독일이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우리가 소련을 도와줘야 하고, 소련이 이기고 있다면 우리가 독일을 도와줘야 한다. 그런 식으로 둘이 서로 최대한 많이 죽이게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소련 사회주의 독재체제가 나치 못지않게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봤죠.

한국전쟁 발발 이틀 만에 2차대전 종전으로 병력이 대폭 감축된 데다 훈련도 부족했던 주일미군을 한반도로 급파하는, 막중한 결정을 트루먼이 내린 배경입니다. 소련이 제대로 임자를 만난 셈이죠(남한으로선 하늘이 도운 시나리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트루먼 이상으로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추동한 건 사실 미국 외교정책의 도덕주의 원칙이었습니다. 전쟁 발발 2개월 전 작성된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서(NSC-68)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죠.

당시 미국의 냉전 전략을 규정한 이 보고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화를 언급하면서 “자유로운 정치제도가 패배한다면 모든 곳에서 패배하는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 붕괴에서 우리가 받은 충격은 이 나라가 지닌 물질적 중요성의 잣대로 잴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런 도덕주의 외교원칙을 가진 미국이 한반도에서 공산권의 일방적인 무력 침략을 방관하는 건 총체적 외교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산권뿐 아니라 미국도 오판을 범합니다. 유럽 중심의 봉쇄정책에 함몰돼 아시아 등 주변부에서 공산권의 도발을 예상치 못한 겁니다. 앞서 리프먼이 예견한 우려가 현실화돼 미국으로선 불의의 일격을 당한 거죠.

한국전쟁 5개월 전 애치슨 국무장관이 태평양 방위선에 일본, 필리핀을 포함하면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것도 유럽 이외 지역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안일한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는 스탈린과 김일성이 남침 시 미국의 무력 개입이 이뤄지지 않을 거라고 오판한 근거가 되죠(시리즈 5회 참고: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903/120996577/1)

1945년 포츠담회담에 참석한 처칠, 트루먼, 스탈린(왼쪽부터). 이 회담에서 트루먼은 핵무기 개발 사실을 스탈린에게 넌지시 알리지만 스탈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하며 허세를 부렸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이와 함께 소련, 중국 등 공산권이 자유주의 진영에 대한 총공격의 서막으로서 한국을 침략했다는 트루먼 행정부의 오인이 과잉 대응으로 이어져 중국의 개입을 초래했다는 게 키신저의 시각입니다. 미 7함대를 대만 해역으로 급파하고, 베트남 독립전쟁을 무력으로 대응한 프랑스에 군사원조를 해준 게 대표적입니다.

제2차 국공내전에서 막 승리한 직후였던 마오쩌둥에게 미국의 이 같은 조치는 아시아에서 중국을 포위해 장제스의 본토 복귀를 도우려는 의도로 비쳤다는 겁니다. 키신저는 “마오쩌둥으로서는 만약 한국에서 미국을 막지 못하면 중국에서 미국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내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결정 시점과 동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초기 북한군 주도의 전황이 일시에 뒤집힌 인천상륙작전을 참전의 계기로 보는 시각이 있고, 이미 그 전에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죠.

그런데 앞서 키신저의 지적대로 당시 중국이 국공내전 직후여서 정권 안보가 아직 불안정한 시기였다는 데 대해선 이견이 없습니다. 예컨대 김동길 베이징대 교수는 한국전쟁 당시 중공 정권이 무너지고 장제스가 재집권할 거라는 ‘변천사상’이 기승을 부리자, 미군이 38선을 넘기도 전에 마오쩌둥이 조기 파병 의사를 김일성과 스탈린에게 전달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유럽 세력 확장에 우선순위를 둔 스탈린이 미국의 손발을 동아시아에 묶어놓기 위해 마오쩌둥의 조기 파병에 부정적이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2차 세계대전 직후 스탈린의 공세적 태도 등으로 인해 미국의 대소련관이 적대적으로 바뀌면서 봉쇄정책이 발생한 과정과, 이것이 한국전쟁에 끼친 영향을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미국의 봉쇄정책이 상정하는 유럽 중심의 전략적 사고로 인해 한반도에서 공산권으로부터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이 한국전쟁이라는 게 키신저의 시각입니다.

하지만 그 봉쇄정책을 낳은 미국의 도덕주의 외교원칙으로 인해 소련, 중국의 예상과는 다르게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만합니다. 다음 회에서는 이런 한국전쟁이 소모적인 제한전(limited war)으로 흐른 배경과 더불어 이로부터 18년 뒤 미국이 적국이던 중국과 전격적으로 손을 맞잡은 ‘미중 데탕트’로 나아간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참고 문헌]
-Henry Kissinger 〈Diplomacy〉 (1994, Simon & Schuster)
-Henry Kissinger, 김성훈 역 <헨리 키신저의 외교> (2023, 김앤김북스)
-Henry Kissinger, 이현주 역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 (2016, 민음사)
-김동길, 박다정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후 및 한국전쟁 초기, 중국의 한국전쟁과 참전에 대한 태도 변화와 배경> (2015, 역사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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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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