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내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1923년 9월 간토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설명은 한결같다. 2017년 아베 정부도, 현 기시다 정부도 ‘모르쇠’로 일관하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를 언제까지 묻어둘 수 있을까. 당시 조선인이 무참하게 살해됐다는 구체적 내용이 담긴 일본군의 보고서가 25일 공개됐다.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에 소장된 ‘간토지방 지진 관계 업무 상보’에는 지진 발생 사흘 뒤 사이타마현에서 40여 명의 조선인이 “살기를 띤 군중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적혀 있다. 이 지역의 병무 담당 기관이 같은 해 12월 육군성에 보낸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지진 피해 지역의 모든 부대에 보고를 지시했던 만큼 다른 지역에서 올린 보고서가 더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100년 전에 일본 정부가 간토대학살에 대해 인지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뚜렷한 물증이다.
▷있는 사실을 부인하려다 보면 말이 꼬이기 마련이다. 지난달 일본 참의원에서는 국립공문서관에 보관 중인 1924년 각의 문건이 공개됐다. “대지진 당시 조선인 범행의 풍설(소문)을 믿은 결과 살상 행위를 한 사람”들에 대한 특사를 논의하는 내용으로, 일본 내각이 학살을 알고 있었다는 또 다른 증거다. 그런데 ‘이 문서가 정부 내 문서인가’를 묻는 질의에 관방장관은 “공문서관은 독립행정법인”이라는 등 동문서답을 내놓으며 답을 피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국무회의 회의록에 해당하는 문서조차 공식 문서로 인정하길 꺼리는 웃지 못할 상황이다.
▷그렇다고 일본 정부만 탓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한국 정부 역시 1950년대 초 이후 간토대학살 피해자에 대한 실태 파악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렇다 보니 상하이 임시정부가 집계한 한국인 희생자는 6661명인데,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500명 정도에 불과하다. 더 늦기 전에 일본 정부에 공식 사과와 공동조사를 요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과거사를 덮은 채 이뤄지는 한일관계 개선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이 되기 쉽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