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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불길 속 두 아이 살리고 떠난 아빠, 부모 구하고 숨진 아들

입력 | 2023-12-26 23:57:00

26일 오전 서울 도봉구의 한 아파트 화재 현장에서 경찰과 소방 등 관계당국으로 구성된 합동감식팀이 감식을 하고 있다. 2023.12.26. 뉴스1


함박눈이 소복하게 내린 성탄절 새벽 안타까운 화재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 고층 아파트 3층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해 30명이 다치고 30대 남성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 사람은 네 식구의 가장인 박모 씨(33)로 생후 7개월인 둘째 딸을 안고 4층 집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딸은 살리고 본인은 숨졌다. 다른 한 사람은 10층에 살던 임모 씨(38)인데 70대 부모와 남동생을 먼저 대피시킨 뒤 맨 마지막에 탈출하다 11층 계단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숨진 박 씨는 단지 내 작은 아파트에 살다 둘째가 태어나자 집을 넓혀 이사 온 지 6개월 만에 참변을 당했다. 박 씨는 “아이 받아주세요”라고 외치며 두 돌배기 첫째 딸을 경비원이 대피용으로 깔아놓은 재활용 종이 포대 더미 위로 던져 살리고 둘째를 안고 뛰어내렸다. 뒤따라 뛰어내린 부인은 어깨 골절상을 입었다. 박 씨는 품에 안은 젖먹이를 위해 추락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다 숨진 것으로 보인다. ‘호미(아버지)도 날이지만 낫(어머니)같이 들 리 없다’는 고려가요 ‘사모곡’ 가사가 무색한 부성애다.

또 다른 희생자인 임 씨는 자식의 부모 사랑도 부모의 자식 사랑 못지않음을 보여주었다. 불이 나자 119에 최초로 신고한 후 부모와 남동생을 깨워 먼저 대피시키다 독한 연기를 마시고 쓰러졌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랑스러운 아들, 월급 받으면 맛집에 모셔가고 계절마다 새 옷을 사주던 살뜰한 아들이 깨어나지 않자 늙은 부모는 오열했다.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네가 죽으면 어떻게 하니. 이제 우린 어찌 살라고.”

고층 아파트에 불이 나면 모든 층에서 스프링클러와 방화문이 작동해야 하지만 이 아파트는 그런 규정이 생기기 전 완공됐다. 소방 당국은 지난달 9일 화재 양상에 따라 세분화한 대피 매뉴얼을 마련했으나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부실한 행정의 틈새로 새어 나온 치명적 화마를 막아낸 건 가슴 먹먹한 가족애다. 이제 해마다 성탄절이 돌아와도 그리운 가족은 돌아오지 않는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슬픔의 성탄절이 아닌, 뜨거운 불길 속에서 목숨 걸 만큼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워주고 떠난 아버지와 남편, 아들과 형을 기리는 사랑의 성탄절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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