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국가는 도시국가로 출발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같은 말을 사용했지만 그리스 국민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이나 스파르타 시민이었을 뿐이다. 고대 로마는 도시국가 로마에서 시작해서 제국을 이뤘지만 사도 바울처럼 로마에 살지 않아도 로마시민권을 갖는 게 중요했다. 근대에 들어와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끼리 한 국가를 이루려 하면서 뒤늦게 민족국가(nation-state)가 등장했다. 서양인에게는 시민의 정체성이 먼저이고 국민의 정체성은 나중이다.
▷우리는 서양과 달리 일찍부터 민족끼리 왕조 국가를 이루고 살았다. 다만 우리는 왕의 신민(臣民·subject)에서 바로 국민(國民)으로 넘어왔다. 서양에서는 절대국가의 신민에서 민주국가의 국민으로 넘어오는 사이에 시민혁명이 존재한다.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이 그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시민혁명이 없었다. 그래서 영미권에서 시티즌(citizen), 프랑스인이 부르주아(bourgois), 독일인이 뷔르거(Bürger)라고 말할 때의 시민 개념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에게 시민은 행정단위의 구성원일 뿐이다. 서울시민이나 부산시민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한국 시민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 말을 써야 할 때가 있다면 국민이라고 쓴다. 미국 대통령은 연설할 때 ‘마이 펠로 시티즌스(my fellow citizens)’라고 부르며 시작한다.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을 모은 유명한 책 이름이 ‘마이 펠로 시티즌스’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통령은 연설할 때 ‘국민 여러분’이라고 부르며 시작한다.
▷한 위원장은 ‘개딸 전체주의’에 대항해 싸우기 위한 용기와 헌신을 당부했다. 동료들끼리 형제애로 함께 꾸려 가는 게 민주주의다. 그렇기에 동료에게 헌신을 요구하고 용기를 요구할 수 있다. ‘동료 시민들이여, 국가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달라’는 케네디 모멘트와도 연결된다. 다만 언어는 사회의 것이다. ‘동료 시민’이 한 개인이 혼자 별나게 쓰는 말에서 벗어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말이 될지는 의문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