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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집서 칼 빼기도 전 칼자루 놓아버린 美… 흔들리는 중동 패권

입력 | 2023-12-31 10:33:00

최강 군사력 보유하고도 공격 주저하자 미국 주도 ‘번영의 수호자’ 작전 3일 만에 와해




소위 ‘국영수’에 밀리는 신세지만 역사는 대단히 중요한 학문이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인간은 욕구에서 동인(動因)을 얻는 동물이다. 욕구는 끝이 없는데 자원은 유한하다. 역사가 분쟁으로 점철된 까닭이다. 기술과 문명이 발달하면서 분쟁 형태만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다. 역사는 크고 작은 분쟁이 반복되며 쓰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분쟁에 대비하는 법과 승리하는 법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다. 동양에서는 “천하가 태평하더라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게 된다(天下雖安 忘戰必危)”고 했고, 서양에서는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고 했다. 현대 정치학에서는 이처럼 대비를 통해 분쟁을 막는 것을 ‘억제(deterrence)’라고 부른다.



패권국 초심 잃은 미국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2년 11월 17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동남아시아 순방 성과를 설명하고 있다. [뉴시스]

억제의 핵심은 적이 감히 도발할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힘이다. 이는 잘 훈련된 군사와 강력한 무기체계 같은 하드웨어, 군사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완성된다. ‘140만 대군’을 갖고도 ‘6만 오랑캐’에 짓밟혔던 송나라, 베르사유 조약으로 온전치 못하던 나치 독일군을 상대로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극을 겪은 영국과 프랑스 사례는 힘만으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교훈을 던져준다.

미국은 압도적 군사력과 이를 사용하겠다는 적극적 의지를 여러 차례 보이며 세계 경찰국가이자 패권국으로 군림해왔다. 미국은 2~11위 국가의 국방비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군비를 쓴다. 11척의 초대형 항공모함과 300대 넘는 스텔스 전투기를 보유한 최강 군대를 갖고 있다. 탈냉전 이후 그런 군대를 통해 힘에 의한 평화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인류 역사상 교과서적인 패권국이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은 초심을 잃은 것 같다.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하자 세계는 “미국이 돌아왔다”며 열광했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망쳐놓은 미국의 동맹 정책이 복원될 것이고, 동맹들과 협력을 통해 미·중 패권 경쟁에서 미국 우위가 더욱 강화되리라는 전망이 쏟아졌다. 서방 세계가 안정되면 자연스럽게 세계 평화도 유지될 것이라는 장밋빛 시나리오가 주류 학계와 언론을 뒤덮었다. 분명 2021년 1월까지 미국은 그럴 수 있는 하드웨어를 갖췄다.

문제는 바이든 행정부라는 소프트웨어가 그 하드웨어를 사용할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집권 직후 트럼프 행정부가 작성한 ‘핵태세검토보고서’를 전면 폐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전임 행정부는 저위력 핵무기를 개발해 각 전구(戰區·Theater)에서 전술적으로 필요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핵 독트린을 바꿨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핵 선제 불사용 원칙으로 회귀했다. 상대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먼저 핵무기를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군사력 강화 중·러에 대응하지 않아

2023년 11월 23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한 거리에 하마스에 납치된 인질들의 사진과 인질 석방을 촉구하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가 걸려 있다. [뉴시스]

기존에 수립됐던 신형 핵무기 개발 계획도 연기 및 축소되거나, 더 나아가 폐기되는 날벼락을 맞았다. 30년 가까이 현대화가 미뤄져 러시아와 수십 년 기술 격차가 발생했다고 지적받아온 핵전력 분야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전략폭격기 등 이른바 ‘핵 3축 체계 현대화’가 모두 지연됐다. 배치 후 반세기를 넘긴 구형 ICBM ‘미니트맨3’를 대체하는 지상기반 전략 억제(GBSD) 프로그램도 연기를 거듭하고 있다. 잠수함 등 해군 전투함에서 발사되는 핵탄두 탑재 순항미사일 개발 사업은 취소됐다. SLBM 역시 1990년 배치된 트라이던트 II 미사일 대체 사업이 지연돼 2040년대까지 기존 전력을 사용하는 것이 거의 확정적이다. 이는 바이든 행정부가 과거 오바마 행정부 시절부터 내려온 이른바 ‘핵 없는 세상 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탓이다.

같은 시기 러시아는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 이행 중단을 선언하고 이른바 6대 전략무기로 불리는 신형 핵무기를 대거 쏟아냈다. 중국 역시 폭발적으로 핵무기와 그 투발 수단을 늘리고 있는데 바이든 행정부는 이에 대응할 생각이 거의 없어 보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사태는 핵무기를 포함해 미국의 글로벌 전략 억제 능력이 크게 약화돼 발생했다. 미국이 유엔 헌장과 국제법체계를 무시한 행위에 강하게 대응할 의지를 보였다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이 대이란 제재를 풀고 후티의 테러조직 지정을 해제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더 나아가 중동 지역에서 항모·상륙함 철수 같은 힘의 공백 사태를 만들지 않았다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미국이 주도한 ‘번영의 수호자 작전’(Operation Prosperity Guardian·OPG)이 용두사미로 끝난 것도 미국의 억제 의지에 대한 동맹국들의 불신이 반영된 결과다.

OPG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을 빌미로 예멘 후티 반군이 세계 컨테이너 물동량의 30%가 오가는 홍해를 위협하면서 시작됐다. 후티는 100번도 넘게 미사일·드론 공격을 홍해에 퍼부었고, 여러 척의 민간 선박이 피격됐다. 글로벌 해운 기업들이 홍해 항로 운항을 중단하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뱃길이 막히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의 동맹·우방국의 이익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기에 글로벌 리더 국가인 미국의 역할론이 부상했다.



항모 두고도 확전 우려해 주저

2023년 10월 12일 미국 핵추진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함이 부산 남구 해군작전사령부 부산작전기지에 입항하고 있다. 이 항모에는 F/A-18E/F 슈퍼호넷 전투기와 이를 지원하는 EA-18G 그라울러 전자전기가 탑재됐다. [뉴스1]

미국 ‘뉴욕타임스(NYT)’ 보도에 따르면 미국, 특히 군부에서는 “화살을 다 막을 수 없으니 화살이 아닌 궁수를 공격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미군은 후티 반군의 미사일·드론 발사 능력 자체를 파괴하고자 엄청난 규모의 군사력을 예멘 인근에 집중 배치했다. 걸프전·이라크전 이후 최대 규모였다.

미국은 예멘 남방 해역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항모를, 이스라엘 앞바다에 제럴드 R. 포드 항모를 전진 배치했다. 미국이 군사 행동을 준비하자 동맹국들도 군함을 파견했는데, 2023년 12월 중순 기준 이 지역에는 초대형 항모 2척, 강습상륙함 1척, 154발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탑재한 순항미사일 원잠 1척이 배치됐다. 이들을 중심으로 이지스 또는 이지스급 중대형 방공전투함 14척과 중형 전투함 7척, 대형 탄약보급선 3척, 초대형 원정전진기지(ESB) 1척 등이 포진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전력이다.

F/A-18E/F 슈퍼호넷 전투기. [동아DB]

이 전력이 예멘 공습에 나서면 수백 발의 순항미사일은 물론, 항모와 중동 전진기지에서 발진한 전투기 수십 대가 예멘 전역의 군사시설들을 단박에 초토화할 수 있다. 미 항모에 탑재된 F/A-18E/F 슈퍼호넷 전투기와 이들을 지원하는 EA-18G 그라울러 전자전기는 예멘 방공망을 돌파해 후티 핵심 거점인 수도 사나 일대를 초토화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췄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2023년 11월 30일 전투기 몇 대를 동원해 사나 외곽의 후티 미사일기지를 초토화하는 공습작전을 성공시키며 항공 전력에 의한 후티 미사일기지 제압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은 칼집에서 칼을 빼기도 전 칼자루에서 손을 놓아버렸다. 공격이 최선이라는 군부의 주장에 백악관이 “후티를 직접 공격하면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하며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백악관은 이라크·시리아에서 미군 기지가 100차례 넘게 공격받아 미군 1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반격을 주저했다. 다국적군을 이끌어야 할 대장 격인 미국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후티를 제압하고 홍해 해상 교통로를 지키자고 의기투합했던 동맹국들도 이탈하기 시작했다.



연대하는 불량국가 네트워크
후티에 대한 군사 작전 준비가 한창 진행되던 2023년 12월 19일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이 카타르에서 43개국 장차관급 인사가 참석하는 화상회의를 소집하고 OPG 구상을 발표했다. 1차 발표에서는 미국을 포함해 10개국이, 2차 발표 때는 20여 개국이 참여한다는 발표가 나왔지만, 이는 사흘 만에 와해됐다. 스페인·프랑스·이탈리아가 다국적군 참여 철회를 선언했다. 특히 스페인은 미국이 자신들과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참여국 명단에 스페인 이름을 올렸다며 항의했다. 결국 20여 개국이 힘을 합쳐 홍해 해상 교통로를 후티 위협으로부터 방어한다던 OPG는 각국이 중동에 파견한 전투함이 개별적으로 민간 선박을 호송하는 형태로 전락했다. 번영의 수호자 작전이 용두사미로 끝나게 된 것이다.

후티 반군과 이들 배후에 있는 이란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져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물론, 지중해 너머 지브롤터 해협까지 차단하겠다며 미국과 유럽 각국을 위협하고 있다. 홍해에 이어 지중해 항로까지 위협받으면 유럽-중동-아시아를 잇는 무역로가 흔들리게 된다. 이는 회복기에 접어든 세계경제에 상당한 충격을 줄 전망이다. 적을 압도하는 군사력을 갖고도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의지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바이든 행정부가 다시 한 번 증명했다.

문제는 ‘시기’다. 2024년은 미국 대선이 있는 매우 중요한 해다. 중국과 러시아, 이란, 북한 등 이른바 ‘불량국가 네트워크’가 더욱 연대해 국제사회에 대한 도발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 내에서 대선이라는 변수와 이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된다면 우크라이나, 중동에 이은 세 번째 전쟁이 언제, 어디에서 터질지 모른다. 여러 전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지난 2년과는 비교 불가할 정도의 난세가 펼쳐질 수 있다. 2024년 한국은 과연 대비가 돼 있을까.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21호에 실렸습니다〉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