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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으로 새해를 보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3-12-31 23:27:00

<78>그림의 질서 만드는 원근법




17세기 화가 에마뉘엘 더비터의 그림에서는 가까운 공간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여자와 문 너머 또 다른 공간에서 청소하는 여성을 볼 수 있다. 시점에서 멀어질수록 작아지는 사람, 문, 바닥 타일이 원근감을 잘 드러낸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

미셸 투르니에가 말했듯이, 성탄절부터 정월 초하루까지의 일주일은 시간 밖의 괄호와도 같다. 실로 이상하지 않은가. 성탄절이 띄운 기분은 어디로 착지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그 마음의 공백 속에서 한 해의 기억은 눈발처럼 뿔뿔이 흩어진다. 그러다 보면 자제력을 잃은 나머지 자칫 맥락 없는 우울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그러나 새해가 되면 다르다. 사람들은 열두 달 365일로 조직된 시간 속으로 약속이나 한 듯이 행진해 간다. 당신의 새해 계획은 무엇입니까. 1월부터는 어엿한 목표를 갖고 살아봅시다. 그래야 다음 연말쯤에는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새해 다짐을 하려는 이에게는 세상을 조직적으로 바라보는 법, 즉 원근법이 필요하다.

원근법의 핵심은 일정한 시점이다. 플랑드르 지역 화가 코르넬리스 더발리외르(Cornelis de Baellieur·1607∼1671)의 갤러리 풍경화나 에마뉘엘 더비터(Emanuel de Witte·1617∼1692)의 실내 풍경화 앞에 서보라. 그 앞에 서면 누구나 화가가 인도하는 일정한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처럼 새해 결심을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한 해를 바라보는 일관된 시선이다. 시점이 분산되어 있으면 자칫 생활이 무질서해질 수 있다. 한 해를 요령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인생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일정한 시선이 필요하다.

일정한 시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은 그 전과는 달리 보인다. 마치 레고 블록처럼 사물들은 체계적으로 배치된다. 더발리외르의 그림 속에서 각진 액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더비터의 그림 속에서 기하학적 패턴이 방바닥을 채우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두 그림에서 거울, 창문, 침대 등 사각의 프레임들이 가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원근법 시스템 속의 레고 블록들로서, 풍경의 체계화에 기여한다. 원근법으로 한 해를 전망해 볼 때, 1월부터 펼쳐질 열두 달의 시간 역시 자기 인생의 레고 블록들이다.

17세기 플랑드르 지역 화가 코르넬리스 더발리외르가 그린 ‘수집가의 방’(위쪽 사진)과 알브레히트 뒤러가 묘사한 원근법 구사 장면.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

그 레고 블록들은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크기가 정연하게 줄어든다. 그 결과, 관객은 멀고 가까운 거리감을 보다 효과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 거리는 공간의 거리인 동시에 시간의 거리이기도 하다. 더비터의 그림 전면을 보자. 빛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떨어지고 있고, 밝은 곳에서 한 여자가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왼쪽에 놓인 어두운 침대 위의 남자는 밝은 곳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이러한 예술적 향유의 시간도 조만간 덧없이 지나갈 것이고, 저 너머에 보이는 것처럼 누군가 들어와 청소를 시작할 것이다.

원근법의 시공간은 관객을 결국 소실점으로 인도한다. 원근법의 관람 포인트는 소실점에 무엇을 배치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1년간의 여정을 12월에 결산하듯이, 원근법은 자신의 여정을 소실점에서 결산한다. 소실점에서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원근법의 목표가 아닐까. 마치 우리의 목표는 속죄와 구원이라는 듯, 더발리외르 그림의 소실점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이 있다. 진정한 성스러움이란 청소 같은 일상에 있다는 듯, 더비터 그림의 소실점 부근에는 청소하는 사람이 배치되어 있다.

무엇이 인생의 소실점에 있느냐 못지않게 의미심장한 것이 소실점의 존재 자체이다. 소실점으로 수렴되는 원근법 덕분에 우리는 인생의 지리멸렬함을 극복할 수 있다. 소실점이 없었다면 분열되었을 세계가 이제 통일된 공간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원근법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원근법을 구사할 줄 안다는 것은, 분열에서 통일을, 혼돈에서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특정 관점에서 인생과 세계를 재창조해내는 창작자가 느끼는 쾌감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를 만들어 낸 창조주가 느꼈을 희열에 가깝지 않을까. 그래서였을까. 르네상스 시기 화가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1397∼1475)는 원근법대로 선을 그어대는 데 매료된 나머지 밤이 깊어도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아내가 우첼로에게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들라고 재촉하자, 우첼로는 이렇게 대꾸했다. “원근법이야말로 진정 감미로운 것이다!”

소설이 곧 현실이 아니듯이, 원근법대로 그린 그림이 곧 현실은 아니다.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가 말했듯이, 원근법의 핵심은 왜곡에 있다. 그것은 휘어져 보일 수밖에 없는 세계에다가 엄정한 수학적 질서를 부여한 결과다. 원근법은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되, 그렇게 축조된 질서는 현실이 아니라 환상인 것이다.

그러니 원근법으로 현실을 재단한다는 것은 너무 숨 막히지 않겠냐고? 수학적 질서가 우리의 현실을 억죄지 않겠느냐고? 새해 결심이 일 년 내내 삶을 속박하지 않겠느냐고? 글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새해 계획은 작심삼일, 기껏해야 작심 석 달이 아니던가. 봄이 되면 피트니스센터 회비는 기부금으로 바뀌어 있을 테고, 운동장을 뛰는 대신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현실은 원근법을 적용한 르네상스 회화보다는 지리멸렬해 보이는 현대 추상 회화를 닮았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