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진단 없이 원인 놓고 갑론을박 데이터 근거로 토론해야 해법 보일 것
장택동 논설위원
“너희 아빠는 집에서 뭐 하니?” “타자 치는데요.” “타자 안 칠 때는?” “책 보는데요.” 질문자는 판사의 친구, 대답한 사람은 판사의 어린 딸이다. 남편이 밤늦게까지 재판 서류를 읽다가 조는 모습을 본 아내는 “당신이 고3이냐”며 혀를 찬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 정인진 변호사가 쓴 ‘이상한 재판의 나라에서’에 나오는 대목이다.
과거에는 이처럼 퇴근길에 자료를 보따리에 싸가서 밤새 씨름하는 것은 판사들의 흔한 일상이었다. 지금도 불철주야 재판을 준비하는 판사들이 적지 않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한다. 법조계에선 ‘워라밸’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법원에도 스며든 데다 근래에 바뀐 제도들이 영향을 줬다고 본다. 한 전직 법관은 “열심히 일하는 판사를 우대할 방법이 없어졌다”고 했다.
판사들이 밤샘 근무를 마다하지 않았던 현실적인 동기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거쳐 법원장으로 승진하겠다는 희망이었다. 그런데 2020년 고법 부장 승진제가 폐지되면서 굳이 재판 실적에 목을 맬 이유가 사라졌고, 판사들의 투표로 법원장 후보를 정하는 법원장 후보 추천제가 도입되면서 고참 법관들이 후배 판사들을 독려하기도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고법부장 폐지나 법원장 추천제 때문이 아니라 사법부의 구조적 문제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대표적인 것이 법관 수가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산술적인 사건 수는 줄었더라도 민사사건은 나날이 복잡해지고, 형사재판은 법정 진술을 중시하는 공판중심주의 도입으로 길어졌는데 법관 정원은 2014년 말 증원 이후 그대로라는 것이다. 경력 법조인을 판사로 임용하는 법조일원화에 따른 법관의 고령화, 잦은 인사이동 등도 신속한 재판의 걸림돌로 꼽힌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재판이 늦어졌겠지만, 사안의 경중을 가려서 급한 것부터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하거나 외부 컨설팅을 받아서라도 정확한 실태부터 진단해야 한다. 주로 재판이 복잡해진 탓이라면 그에 따라 판사들이 사건당 투입하는 시간이 얼마나 늘었는지, 법관의 근태 때문이라면 실질적인 업무량이 어느 정도 줄었는지 정밀하게 따져서 데이터를 산출하는 게 먼저다. 그래야 법원의 근무 시스템이나 기강을 개선하면 될 일인지, 법관 증원이 불가피한지 판단할 수 있다.
고법 부장 폐지와 법원장 추천제도 마찬가지다. 제도를 바꿀지 말지를 놓고 각자 주장만 내세울 게 아니라 법관의 근무 태도와 재판 기간에 미치는 영향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뒤 자료를 놓고 토론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생략한 채 알맹이 없는 공론(空論)을 주고받는 것은 문제 해결을 늦출 뿐이다.
지연된 재판의 당사자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고 있다. 형사 피고인에게는 재판이 길어지는 것 자체가 처벌이나 다름없다. 민사재판 판결을 기다리는 사이에 가정이 파탄 나거나 기업이 문을 닫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이 누적되면 국민이 법원을 믿지 못하게 된다. 재판 기간이 10% 길어지면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가 2% 정도 떨어진다는 분석도 있다. 재판 지연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조희대 대법원장의 실행력과 리더십이 절실하다.
장택동 논설위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