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로버트 벤턴의 ‘노스바스의 추억’
뉴욕 북부의 작은 동네 노스바스. 폭설이 맘껏 내리는 곳. 예순이 넘은 설리는 중학교 은사인 베릴의 집에 세 들어 산다. 평생을 일용직 노동자로 부초처럼 살아왔다. 젊은 시절 결혼도 했으나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가족을 버렸다. 그렇다고 멀리 가지도 않았다. 도보 30분 거리에서 요령껏 마주치지 않고 지낸다. 친구들도 변변치 않다. 세간의 눈으로 보자면 낙오자들이다. 설리는 이런 동네 사람들과 다투고, 마시고, 일한다. 살아온 날에 대한 후회도, 살아갈 날에 대한 포부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살며 옆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한다. 그게 가족이 아닐 뿐이다. 집주인 베릴 선생은 그가 방탕해지지 않게 엄마처럼 잔소리를 한다. 60대 남성과 80대 여성이 끌어가는 극인데도 힘겹거나 느릿하지 않다. 오히려 두 배우의 관록이 뿜어내는 매력이 대단하다.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작년 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해가 바뀌었다. 세월의 체감 속도는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낯선 길은 긴 것 같고, 익숙해질수록 짧게 느껴진다. 초행길은 큼지막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낯익게 되면 무심코 지나친 것들이 눈에 밟힌다. 소소한 것들의 의미를 읽고 세상사와 연결 짓는 혜안도 생긴다. 예전엔 나이 들수록 대접을 받았다. 의사, 학자, 영화감독 등등의 직함 앞에 ‘노’자가 붙을수록 실력이 좋았고 존경받았다. 요즘은 노인들의 지혜보다는 디지털 지식이 존중받는다. 그것이 돈으로 귀결되고, 돈이 최고가 되었다. 젊음이 우선권을 갖고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나이 먹는 걸 두려워하며 창피해한다.
우리 동네에는 40년 된 밥집이 있다. 혼자라는 느낌이 드는 날이면 이곳에 간다. 밥을 먹으며 주인과 하루의 인사를 나누고, 한 달의 안부를 묻고, 그렇게 또다시 새해 인사를 나누는 곳. 반백수인 내가 그나마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확인받으며 마음을 놓는 곳이다. 이럴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이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주인과 일하는 분들 모두 여든을 바라본다. 이들이 뿜어내는 기운은 젊고 세련된 식당이 따라 할 수 없는, 귀한 문화재급이다.
영화 내내 변두리 동네의 일상이 혼잣말하듯 소소하게 펼쳐진다. 남루해 보이지만 그 삶의 틀에 눈높이를 맞춰보면 그들이 만든 소박한 동심원에 마음이 일렁인다. 원제 ‘Nobody’s fool’처럼 아무도 바보가 아니다. 다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고 있다. 내 삶은 특별할 것이 없다고 주눅들 필요도 없다. 일상의 구석구석을 채워주는 것들, 생색내지 않아 특별하게 여겨본 적이 없는 것일수록 소중하다는 걸, 나이 들어가면서 알게 된다. 나이가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정향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