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자신을 해치는 행위는 도움을 받으려고 병원을 찾는 환자에게서도 자주 관찰됩니다. 처방받은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는 행위부터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주저하다가 조기 진단과 치료 시기를 놓쳐서 치유가 힘든 말기 암 판정을 받는 경우까지 다양합니다. 심장 질환과 공격성 사이의 연관관계도 밝혀져 있습니다. 우울증도 공격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 밤잠도 설치면서 자신을 비난하는 증세를 지속해서 보인다면 공격성이 밖으로 남을 향하지 않고 안으로 자신을 향해 작동돼서 우울증이 생긴 것으로 봅니다.
공격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비난, 욕설, 위협, 반항으로 나타나고 전쟁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패를 갈라서 시위하거나 항거하면서 다툽니다. 여러 사람이 모인 집단에서 공격적인 행위가 일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를 모으면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개인 각각에서 죽음의 본능이 점화되어 모이면 더욱더 파괴적으로 움직입니다. 삶의 본능과 균형이 무너지면서 ‘집단자살’이라는 불행한 결과로 이어진 일들이 있었음도 사실입니다.
집단적 공격성 분출은 지도자의 카리스마와 연관이 있습니다. 지도자의 기만과 현혹에 휩싸이면 숨겨져 있는 의도가 보이지 않거나 알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무시합니다. 주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들려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능란한 이야기에 넘어가서 가슴이 뭉클해진 구성원들이 열정적으로 충성을 서약하면서 그 집단은 스스로 파괴하는 길로 우르르 몰려가게 됩니다.
자기 보존이 인생의 목표여야 함에도 자신의 신체나 정신에 해를 주는 자기 파괴적 행위가 흔히 일어나는 현실은 역설이자 모순입니다.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스스로 파괴하는 방법을 습득한 현대인에게 약물 남용이나 자해는 이미 일상적인 현상입니다. 이미 마약중독마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손상하는 자해는 아주 흔합니다. 자해는 대부분 고통스러운 감정을 처리하려고 그렇게 합니다. 자살은 타살보다 훨씬 더 흔합니다. 자해 행위가 강박적으로 반복되면 겉으로 보기엔 그 사람의 팔자처럼 보이지만 실체는 죽음의 본능이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으로 태어나서 현명하게 살려면 공격성은 물론이고 죽음의 본능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삶에 지쳐서 태어난 것 자체를 원망하기도 하지만 우연히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연 수명이 다할 때까지 이런저런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입니다. 생식의학의 관점에서는 확실히 그러합니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 착상되고 자라고 세상의 빛을 보았으니 경이로운 일입니다. 태어나지 못했기에 죽을 수도 없는 잠재 생명체들을 생각하면 태어났기에 스스로 죽을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글을 읽고 깨달은 바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삶의 본능에서는 생생함을, 죽음의 본능에서는 겸손함을 취하면서 참고 기다리며 묵묵히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