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화두 현역의원 ‘물갈이’
● 점점 짧아지는 현역 의원 ‘유통기한’
총선 공천 때가 되면 여야 정치권에서 공통적으로 거론되는 화두가 있다. ‘현역 의원 교체론’이다. 기득권의 상징으로 비치는 현역들을 대거 교체해야 혁신의 이미지를 극대화할 수 있어서다. 이를 통해 얻은 여론의 지지가 총선 승리의 동력으로 작용한 경우가 많았다.
민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울, 경기, 인천 모두 4월 총선 지역구 선거에서 “현역 의원을 뽑겠다”는 응답보다 “다른 인물을 뽑겠다”는 응답이 더 높게 나타난 것(동아일보사 신년 여론조사) 등 여러 여론조사에서도 현역 의원에 대한 비토가 높게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국회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1차적인 원인이다. 그렇지만 의원 개개인의 의정 활동을 유권자들이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된 미디어 환경의 변화, 다양해진 유권자의 요구 등 과거와 달라진 정치환경도 현역 의원들의 ‘유통기한’을 짧게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여의도의 한 인사는 “현역들의 교체 주기가 빨라지고 폭이 넓어지는 것은 시대의 흐름”이라며 “10년 전만 해도 ‘물갈이’라고 하면 중진들에게 주로 해당되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초·재선 의원들도 피해 갈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초선 의원도 당과 지역 유권자들 사이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면 언제든 교체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에 ‘세대교체론’을 앞세운 국민의힘은 789세대(70·80·90년대생)를 중심으로 새 얼굴을 대거 영입할 것으로 예상되고, 친명과 비명 간의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는 민주당에서도 결과적으로 절반에 가까운 현역 의원 물갈이가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유권자들은 기득권의 상징처럼 비치는 현역 의원들에 대한 물갈이를 혁신으로 보는 성향이 있다”며 “기성 정치인에 대한 불신, 각 당의 내부 사정에 양당의 쇄신 경쟁까지 더해지면 이번 총선에선 물갈이 폭이 역대급이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 與, 15·17대 총선 공천 주목
여권 내부에선 15대(1996년)와 17대(2004년) 총선 공천을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대대적인 외부인사 영입을 통한 세대교체’(15대), ‘중진 20여 명의 불출마 선언을 통한 당의 기사회생’(17대)을 이뤄낸 당시 전략을 참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민의힘의 전신인 신한국당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정치권 세대교체’ 바람을 일으켜 반전을 이뤄냈다. 김영삼 정부 집권 4년 차, 직전 지방선거 패배로 인한 지방정치의 여소야대 상황 등으로 정권 심판론이 확산됐을 때다. 이춘구 당시 당 대표를 비롯한 중진들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데 이어 이회창 전 총리, 박찬종 전 의원의 입당으로 당의 구심점이 바뀌었다. 공천에선 이재오, 김문수, 홍준표 등 당시로선 개혁 성향의 신인들을 대거 영입해 쇄신 분위기를 조성했다. 신한국당은 과반에 육박하는 140석을 얻었다. 예상을 넘어선 선전이었다.
‘탄핵 역풍’ 속에서 치러진 2004년 17대 총선 때도 한나라당(국민의힘의 전신)은 대대적 물갈이 공천으로 ‘기사회생’했다는 평가다. 최병렬 오세훈 전 의원 등 불출마자 20여 명과 공천 탈락자까지 합쳐 148명 현역 의원 중 총 60명이 교체됐다. 40.5%에 이르는 현역 의원 교체율은 121석 확보라는 최악의 위기를 면하는 데 한몫을 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인요한 혁신위원장의 ‘희생론’에 이어진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총선 불출마’는 대대적 물갈이를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이 많다”며 “현역 의원들의 2선 후퇴와 세대교체가 이번 공천 전략의 주요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野, 집안싸움 속 물갈이 ‘기준’ 고심
민주당도 인적쇄신에 시동을 걸었지만 당내 사정이 복잡하다. 민주당은 21대 총선에서 121석이 달린 수도권에서만 103석을 얻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었다. 사실상 정치신인이 노려볼 만한 적지(敵地)가 거의 없다 보니 같은 당 안에서 현역 의원의 ‘수성’과 원외 인사의 ‘도전’ 경쟁이 치열하다.
그간 민주당은 하위 20%에 든 현역 의원의 경선 득표를 일괄적으로 20% 감산했지만 총선기획단은 이번 총선에서는 하위 10% 이하 의원들에 대해선 감산 비율을 30%로 강화했다. 경선 과정에서 여성, 청년일 경우 25% 가산점을 받는데 하위 20% 이하 현역의원에게 득표 감산 비율 20∼30%를 적용하면 사실상 역전이 불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최소 30명 이상의 현역 의원들이 교체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친명계 원외 모임으로 불리는 더민주전국혁신위원회는 한발 더 나아가 민주당이 선제적으로 ‘현역 의원 50% 물갈이’를 제도화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당내 중진들에 대한 ‘용퇴론’도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당 지도부 안에서는 이미 대표적 ‘86세대’ 정치인들과 전임 정부에서 장관, 청와대 핵심 참모 등 주요 직위를 맡았던 인사들의 ‘자기희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쇄신 대상으로 거론하는 인사들은 대부분 비명 진영에 속한다. 치열한 계파갈등 속에서 인적쇄신이 자칫 ‘공천학살’로 비치거나 비주류 신당 출현이라는 적전분열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당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 “현역 교체율보다 내용이 중요”
그렇다면 대대적인 물갈이는 우리나라의 정치와 각 정당을 더 나아지게 했을까.
21대 국회에선 300명의 국회의원 중 절반이 넘는 151명의 초선 의원이 원내에 입성했다. 재·보궐선거와 비례대표 승계를 거치면서 그 수가 더 늘어 현재는 155명이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를 개혁하는 동력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21대 국회를 부끄럽게 만드는 데 일조한 면이 크다. 공천권을 쥔 당 지도부나 실세들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정치인’ ‘생계형 정치인’ ‘홍위병’ 등의 비판도 이어졌다.
물론 서로가 극단적으로 맞서는 양극화된 진영정치가 구조적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불출마를 선언한 민주당 초선 홍성국 의원은 “바꿔보려 노력했지만 제로섬 법칙이 지배하는 정치현실에 한계를 느꼈다”며 “객관적인 주장마저도 당리당략을 이유로 폄하받기도 했다”고 말한 것도 현역 의원들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직 양당의 공천이 가시화하지 않은 상태다. 다만 전문가들은 현재까진 여야 모두 유권자 기대에는 못 미치는 상황이라는 평을 내놓는다. 국민의힘에선 한 비대위원장이 등판한 이후 오히려 ‘찐윤핵관’만 대거 공천받을 것이란 우려가 적지 않다. 민주당에서도 중진이 다수 포진한 친명 그룹 및 지도부 내에서 희생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친명계 후보들의 ‘자객 출마’ 논란만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편이 이기는 것이 목표’인 선거에서 각 당은 정치공학적 계산을 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이런 이유에서라도 현역 의원 물갈이 과정이 보다 투명하게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단순한 교체비율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민심과 동떨어진 계파의 이익을 우선시한 사천(私薦)의 결과는 정치의 후퇴라는 것을 역대 선거가 보여줬다. 물갈이가 시대의 흐름이라면 시대의 변화를 반영할 수 있는 인물을 적극 발굴하고 발탁하는 것이 공당의 의무다. 그것이 당과 정치가 사는 길일 것이다.
길진균 논설위원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