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단독]“딸이 다리를 잃었는데… 우회전 일시정지 1년, 법만 강화하면 뭐합니까”

입력 | 2024-01-04 03:00:00

사고 6% 감소, 사망은 13% 늘어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구청 앞 사거리에 설치된 \'우회전 시 보행자 주의\' 표지판. 지난해 1월 보행자 안전과 교통사고 감소를 위해 전방 적색 신호 시 우회전 일시 정지를 의무화하면서 운전자 안내를 강화하기 위해 설치됐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딸이 지금 왼쪽 다리를 절단하고 있어요. 우회전 버스에 깔리는 바람에….”

지난해 12월 23일 경기 수원시의 한 병원. 전날 교통사고를 당한 간호사 신모 씨(27)의 아버지가 수술실 앞 보호자실에서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신 씨는 22일 오전 8시 반경 경기 안양시의 한 교차로에서 파란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우회전하는 마을버스에 치였다. 앞바퀴에 다리가 끼인 채 약 3m를 끌려간 신 씨는 “왼쪽 정강이 아래를 모두 잘라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사고를 낸 운전사 조모 씨(48)는 경찰 조사에서 “왼쪽에서 오는 차를 보느라 횡단보도를 못 봤다”고 진술했다. 안양만안경찰서는 조 씨가 교차로에서 우회전 중 신호를 위반하고 보행자 보호 의무를 게을리한 사실을 확인해 조만간 송치할 예정이다. 신 씨의 아버지는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할 딸을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진다”며 “운전자들이 안 지키는데 법이 강화되면 뭐 하나”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해 1월 22일 보행자 안전과 교통사고 감소를 위해 ‘전방 적색 신호 시 우회전 일시 정지’를 의무화한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이 시행됐다. 이달 22일로 1년을 맞이한다. 하지만 관련 교통사고는 크게 줄지 않고, 사망자는 오히려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동아일보가 경찰청으로부터 입수한 ‘연도별·월별 우회전 교통사고 현황(2018∼2023년)’에 따르면 우회전 일시정지 의무화 이후인 지난해 2∼11월 관련 사고는 총 1만4211건 발생해 전년 같은 기간보다 848건(5.6%) 줄었다. 반면 사망자 수는 89명에서 101명으로 13.4% 늘었다.






“우회전車 65% 일시정지 안지켜”… 사망자 39%가 대형차 사고

‘우회전 일시정지’ 1년
“150대 중 98대 횡단보도 정지 않고, 승용차-버스 꼬리 문채 그냥 지나가”
“대형차량 360도 카메라 설치하고, 교차로 멀리 횡단보도 설치 고려를”

2일 오전 8시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중앙사거리. 신정 연휴가 끝나고 출근하는 회사원 여러 명이 인도에서 교통섬으로 이어진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멀리서 마을버스가 속도를 줄이며 횡단보도를 향해 다가왔다. 하지만 버스는 멈추지 않았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한 보행자 1m 앞에서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앞바퀴는 횡단보도 정중앙을 밟고 있었다.

두 달 전 바로 이 횡단보도에서 한 60대 여성이 우회전 버스에 치여 숨졌다. 당시 운전사는 경찰 조사에서 “왼쪽 직진 차량을 확인하느라 숨진 여성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경찰 관계자는 “운수회사에 ‘우회전 교육을 하라’고 계도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 ‘우회전 일시 정지’ 지킨 차는 3대 중 1대뿐
이날 오전 동아일보 기자가 판교테크노중앙사거리와 경기 고양시 종합운동장 사거리 등 2곳에서 각각 1시간 동안 모니터링한 결과 우회전 일시 정지 의무가 있는 차량 150대 가운데 98대(65.3%)가 보행자가 건너려는데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횡단보도를 지났다. 차량 3대 중 2대꼴로 법규를 위반한 것이다.

고양시 종합운동장 사거리에선 우회전 차량 87대가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보행자를 맞닥뜨렸다. 하지만 이 중에서 57대(65.5%)가 일시 정지하지 않고 통과했다. 횡단보도에 들어선 보행자 앞으로 승용차 3대와 버스 1대가 꼬리를 물고 빠른 속도로 통과하는 아찔한 장면도 펼쳐졌다. 이날 살펴본 차량 중 버스나 화물차 등 대형 차량은 49대였다. 이 중 71.4%에 달하는 35대가 일시 정지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

지난해 1월 22일부터 개정 도로교통법 시행규칙이 시행되면서 모든 우회전 차량은 전방 차량 신호등이 적색일 때 보행자 유무에 상관없이 무조건 일시 정지한 후 통과해야 한다. 2022년 7월부터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뿐 아니라 ‘건너려 할 때’도 차량이 멈춰야 한다. 어기면 4만∼7만 원의 범칙금이 부과된다.

새 법규가 도로 현장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건 전방 신호와 보행자 유뮤 등에 따라 달리 적용돼 복잡한 데다, 홍보와 계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재원 도로교통공단 교수는 “일부 해외 국가들처럼 ‘횡단보도 앞에서 일단 일시 정지’ 등으로 법규를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 교통섬 줄이고, 대형차 어라운드뷰 설치 확대해야

특히 대형 차량의 경우 사고 시 피해가 커 경각심이 요구된다. 경찰청 우회전 교통사고 통계에 따르면 최근 5년여간 전체 우회전 교통사고 10만7985건 중 버스, 화물차 등 대형 차량에 의한 교통사고는 1만9246건으로 17.8%에 불과한데, 전체 사망자 762명 중 대형 차량 관련 사망자는 298명(39.1%)으로 2배에 달했다. 사망자 수를 전체 사고 건수로 나눈 치사율도 대형 차량이 1.53%로 일반 승용차량(0.52%)의 3배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일부 대형 차량 운전자들은 200만 원에 달하는 ‘어라운드뷰’(차량 주위를 360도 비추는 카메라)를 자비로 설치하기도 한다. 어라운드뷰 제작 업체 권해익 대표는 “우회전 사고에 대한 위험성이 알려지면서 설치 문의가 늘고 있다”며 “우회전 시 보행자를 감지해 알림을 울리는 인공지능 기능을 탑재한 어라운드뷰 기술이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고 전했다. 경기도는 지난해부터 20억 원가량을 들여 도내 26개 버스업체의 버스 900여 대에 어라운드뷰를 설치해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도로 환경 개선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채홍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대형 차량은 오른쪽 사각지대가 넓어 보행자를 놓치기 쉽고, 회전 반경이 커 사고 시 피해가 더 크다”며 “교차로 면적이 넓어진다는 단점이 있지만, 횡단보도를 교차로에서 멀리 떨어뜨리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고 제언했다. 유정훈 아주대 교통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대형 차량은 노선을 조정해 교차로 구간은 우회하도록 하고, 보행자 안전에 취약한 교통섬은 줄여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우회전 일시 정지를 의무화한 지 1년이 되어가는 만큼 계도에서 단속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방향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주현우 기자 wooj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