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토번의 다이묘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그린 그림. 반대파에 의해 실각하며 이성을 잃기 전까지 그는 유능한 인물을 기용해 토지 조사, 불교 억압 같은 파격적 개혁을 시행한 명군이었다. 아래쪽은 그가 가신들에게 보낸 서한.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아마존 홈페이지
나리아키 개혁 함께한 후지타
나리아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신하 후지타 도코. 사진 출처 일본대백과사전 홈페이지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이성 잃은 주군에 쓴소리
후지타는 ‘쓴소리’를 하기로 작정하고, 주군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걸고 나섰다. 그는, 문벌파(門閥派)를 대표하던 유키가 중하층 사무라이들의 정치적 도전을 막으려고 막부에 공작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지만, 나리아키의 폐위까지 의도한 것은 아닐 거라며 “다만 약발이 지나치게 들어서, 노공(老公·나리아키)까지 이같이 되신 것에는 유키도 놀랐을 것”이라고 나리아키를 달랬다. 또 나리아키를 몰아낸 혐의를 받고 있는 문벌파 대신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대화해서, 그들이 심복하게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적대하지는 않도록 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나리아키의 마음을 읽은 과격파들은 더욱 설쳐댔다. 그들은 스스로 ‘유지(有志)’라고 칭하며, 상대 진영을 싸잡아 간신배라고 공격했다. 후지타는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해도 같은 가신단에게 간신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며 “제가 생각해 보건대, 간인(姦人)이라고 할 정도의 자는 아무리 봐도 안 보이고, 공자가 말하는 비부(鄙夫)만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이것도 간(姦), 저것도 간이라고 지목한다면, 점점 비부(鄙夫)의 당류(黨類)는 많아지고, 당대뿐 아니라 자자손손까지 파를 나누고 당을 세우게 되어 국가영세(國家永世)의 대해(大害)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상대방이 못났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아무에게나 ‘간(姦)’의 ‘레테르’를 갖다 붙이면 대화와 협상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얘기다. 상대 당이라고 무조건 악마화하면 진영 대립은 깊어지고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매우 힘들 것이었다.
후지타 호소에도 자멸한 나리아키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사망한 뒤 미토번의 가신들이 일으킨 텐구당의 난을 그린 그림. 나리아키는 반대파를 포용해야 한다는 후지타의 충고를 듣지 않았고, 이들을 가혹하게 숙청했다. 결국 미토번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휩싸여 자멸하고 말았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나리아키는 끝내 후지타의 호소를 듣지 않았다. 몇 년 후 권력을 되찾자 그는 유키부터 종신금고형에 처했다. 후지타는 종신금고라는 극형을 내리면 퇴로를 차단당한 그 일파가 필사적으로 저항할 것이라며, 일정 기간 구금하는 데 그치도록 진언했다. 유키가 종신금고를 당하자 후지타의 우려대로 그 일파는 극렬한 저항에 나섰고, 나리아키는 결국 유키와 그 일당들을 아예 처형해버렸다. 이쯤 되자 양 진영 간 원한은 걷잡을 수 없게 되고, 결국 미토번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휩싸여 자멸했다.
쓴소리는 누구나 싫다. 가족이 해도 싫은데 신하나 부하의 쓴소리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성공에는 필수요소다. 한두 번까지는 불쾌한 걸 참고, 귀를 열던 사람도 그 이상 계속되면 등 돌리고 싶어진다. 바로 여기가 위대한 지도자와 범부(凡夫)가 갈리는 지점이다. 동서고금, 예외가 없었다. 귀에 달콤한 말은 다 독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 누리는 권력은 쓴소리로만 유지될 수 있다. 그 대신 권좌에서 내려왔을 때, 달콤한 찬사가 쏟아질 것이다.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