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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겨울 정원에 가고 싶어요. 우리, 수원에서 만날까요.” [김선미의 시크릿가든]

입력 | 2024-01-05 18:00:00

수원의 새로운 수목원, 일월수목원과 영흥수목원




수원 영흥수목원 온실 내부. 하트 모양으로 보이는 돌 틈새 사이로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다. 수원=김선미 기자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그 시선이 계절을 담은 정원을 향하고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수원 일월수목원 방문자센터에 들어섰을 때, 당신과 함께 정원을 바라보는 상상을 했답니다. 너른 통유리 창을 통해 겨울 정원이 펼쳐지고 있었어요. 소파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구나’. 정면의 나무들을 고요하게 응시하다가 옆 사람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참 온화했어요. 그 정원에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요.

수원 일월수목원 방문자센터. 통유리창을 통해 수목원과 일월저수지가 한 눈에 내려보인다. 수원=김선미 기자



●겨울 정원의 미학
겨울에 데이트할만한 장소를 묻는다면, 주저 없이 겨울 정원이라고 답하겠어요. 수원시는 지난해 5월 동쪽(영통구)에는 영흥수목원, 서쪽(장안구)에는 일월수목원을 열었어요. 수원 어디에서든 차로 20분 내로 도달하는 두 공립 수목원에는 추운 겨울에도 기품 있는 경관을 전하는 ‘겨울 정원’이 있답니다.

눈 내린 일월수목원. 수원시 제공

눈 내린 영흥수목원. 수원시 제공

대왕참나무 잎사귀와 수국 꽃은 잘 나가던 계절의 빛은 잃었을지언정 형태는 굳건히 남아 있어요. 잎이나 꽃잎이 시들기는 해도 떨어지지는 않는 식물 생리현상을 ‘조위성’(凋萎性)이라고 하는데요. 우리네 사랑도 닮은 것 같아요. 사랑은 떠나도 사랑했던 기억은 남아 있잖아요.

영흥수목원의 마른 수국 위로 눈이 내린 모습. 수원=김선미 기자

겨울 정원은 갈색을 사랑하게 만들더군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는 화양연화(花樣年華)가 꼭 젊은 날이어야 할까요. 봄 여름 가을을 지내고 산전수전을 겪은 겨울 정원의 갈색 식물들은 오후 세 시의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어요. 요즘 유행인 절제된 ‘올드머니 룩’(시간이 빚어낸 고급스러운 자연미)이 그곳에 있었어요. 분홍과 파랑의 여름 수국은 싱그럽지만, 갈색 겨울 수국의 우아한 분위기만큼은 따라올 수 없을 거예요.

비록 말랐지만 형태가 남아 겨울 정원을 이루는 일월수목원의 식물들. 수원=김선미 기자

겨울 정원은 형태와 질감이 선명해집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요. 잎을 떨군 나무들의 몸통에 가만히 손바닥을 대 봅니다. 은사시나무는 수원에 자생하는 수원사시나무와 이태리포플러인 은백양이 자연교잡해 생겨난, 수원을 대표하는 나무에요. 그 하얀 몸통이 영혼을 청량하게 깨우는 듯했어요. 가을 단풍이 고왔던 중국복자기는 붉은 수피를 종잇장처럼 벗는 모습도 예술이네요. 심은 지 얼마 안 돼 아직 작은 붉은 말채나무와 노랑 말채나무가 좀 더 자라나면 겨울 정원에 은근한 화려함을 더하겠죠. 사라지는 것들을 애도하려고 했는데 웬걸요. 그 속에 구원이 있어요.

일월수목원 겨울정원의 붉은말채나무. 줄기가 붉어 무채색 겨울 정원에 활력을 준다. 수원=김선미 기자

겨울의 마른 그래스(풀)는 ‘와비사비’(わびさび) 미학도 떠올리게 합니다. 불완전하고 비영속적이며 미완성된 수수한 것들의 아름다움이요. 흔히 일본의 미적 감성이라고 여겨지지만, 솜씨 좋은 조선의 도공들이 일찍이 불완전한 막사발을 빚지 않았더라면 와비사비는 애초에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란 평가도 있지요.

그래스와 마른 꽃들이 어우러진 일월수목원의 건조정원. 수원=김선미 기자

그래스는 다른 식물에게 은근한 배경이 되면서 오히려 존재감이 돋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 이런 대사가 있었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욕심인걸요. 인간의 사랑이 어떻게 완전하고 영속적일 수 있겠어요. 부족한 점들은 이해하면서 서로에게 그래스 같은 배경이 되어 주었으면 합니다.

오후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풀들. 수원=김선미 기자

일월저수지 주변도 함께 걷고 싶어요. 수목원이 바로 옆에 조성되면서 저수지를 찾는 철새들이 늘었다고 해요. 정원 문화가 성숙하면 그다음 단계로 탐조 (探鳥) 문화가 이어진다죠.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가 둘러싼 일월저수지에 흰색 이마를 가진 물닭들이 헤엄치는 풍경을 보면서 가만히 불러보았어요.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시인과 촌장의 ‘풍경’)….

철새들이 찾아오는 일월저수지의 평화로운 풍경. 수원=김선미 기자



●조선의 식목왕과 가드너
겨울 풍경에 설경(雪景)이 빠질 수 있나요. 하얀 눈이 내린 어느 추운 날, 수원의 동쪽 영흥수목원에 가보았어요. ‘정조효원’이라는 이름의 한국 정원에 소복하게 눈이 내려앉았더랬죠. 매서운 추위였지만 정조의 효심과 사상을 기억하는 화계와 돌담, 계류와 연못가를 걷는 고요함이 좋았습니다.

눈 내린 영흥수목원의 정조 효원. 수원=김선미 기자

수원 화성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신도시에요. 신도시 화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도록 한 정조의 ‘미래를 보는 눈’에 탄복합니다. 창덕궁 후원 등 정원에서 위로받고 성찰한 긴긴 시간이 쌓여 그 혜안이 만들어진 것 아닐까요.

다산이 즐겨 가꿨던 식물들을 심은 일월수목원 다산정원. 수원=김선미 기자

수원의 두 수목원은 ‘조선 최고의 식목왕’ 정조와 ‘조선 최고의 가드너’ 다산 정약용 선생의 스토리를 공간으로 풀어냈습니다. 영흥수목원에 정조효원이 있다면 일월수목원에는 ‘다산정원’이 있어요. 다산이 평생 즐겨 가꿨던 석류, 매화, 치자나무, 파초, 국화를 심은 곳이에요. 온몸으로 상상합니다. 맑은 치자꽃 향기를 맡고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던 조선의 로맨틱한 과학자 다산을….


●정원 온실 세계 여행
수원의 두 수목원에서는 시간 여행만 가능한 게 아니에요. 마음만 먹으면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로 매일 해외여행을 떠날 수 있어요. 영하 10도의 추위도 문제 될 게 없는 여행이에요.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소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 수목원 온실로의 여행이랍니다.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일월수목원 온실. 수원=김선미 기자

아열대 우림을 테마로 삼은 영흥수목원 온실. 수원=김선미 기자

온실에 들어섰을 때 안경에 김이 하얗게 서리면 지구 반대편으로 순식간에 공간 이동이 마쳐진 겁니다. 독특한 질감과 화려한 색상의 이국적 식물들, 연못과 물소리…. 온실은 추운 겨울 정원 속 오아시스입니다. 부드러운 곡선의 온실 보행로는 미지의 세계로 안내하는 탐험가의 길이죠. 왠지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온실에서는 당신의 웃음소리가 식물의 호흡과 섞여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랑의 칵테일이 만들어질 것 같아요.

영흥수목원 온실 내부 풍경. 청개구리와 붉은색 꽃의 대비가 화려하다. 수원=김선미 기자

일월수목원 온실은 건조·지중해, 영흥수목원은 아열대 우림을 기후대 테마로 하고 있어 첫인상부터 확 달라요. 일월수목원에 부겐빌레아와 밍크 선인장이 있다면, 영흥수목원에는 화려한 관엽식물들과 빅토리아 수련이 살아요. 밖에는 흰 눈이 펑펑 내리는데 말예요.

일월수목원 온실의 부겐빌레아. 수원=김선미 기자

잎이 큰 관엽식물들이 일품인 영흥수목원 온실. 수원=김선미 기자



●자연과 시간의 정원
정원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봤으면 해요. 두 수목원은 어느 날 뚝딱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일월수목원은 수원시가 2014년부터 10년 가까이 조성했어요. 영흥수목원은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지방재정이 부족해 민간사업자가 공원을 조성해 기부채납하는 도시공원 민간특례사업으로 문을 열었죠. 지금은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앞마당이 되는 진정한 도심형 수목원입니다. 연간 회원권(성인 기준 연 3만 원) 끊어 틈나는 대로 볕 좋은 책마루에 앉아 정원과 생태 관련 책을 읽고, 식물 세밀화 전시를 즐길 수 있는 주민들이 부럽습니다.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쉼터 기능을 하는 영흥수목원. 수원시 제공

각종 정원과 생태 관련 책들을 갖춘 영흥수목원 책마루. 수원=김선미 기자

건축물을 보면서 건축가를 기억하듯, 이제는 정원사의 노고에도 감사를 돌리는 사회 수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소개하고 싶은 정원사가 있어요. 2017년 일월수목원 조성 초기부터 참여한 김장훈 수원시 녹지연구사입니다. 과거 논밭이었던 일월수목원 터를 지금의 모습으로 일군 주역이지요. 사업 추진 초기부터 수목원 전문가를 채용한 수원시도 선례 드문 앞선 행정을 보여줬습니다. 서울대 출신 전문 정원가인 김 연구사가 일월수목원을 가꾸고 영흥수목원의 개원까지 도운 마음을 짐작합니다. 정원을 일으키고 돌본 일종의 부성(父性) 아니겠어요.

일월수목원 조성 초기부터 수원시청 수목원 전문가로 참여한 김장훈 정원사. 수원=김선미 기자

그는 말을 아꼈지만, 창의적인 도전을 이어 나가기에 공무원 사회는 여전히 딱딱한가 봅니다. 다음 달 이곳을 떠나는 그는 당부합니다. “당장 식물들이 자라나지 않아 허전해 보인다고 이것저것 마구 심거나 무리하게 변형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계속 겸손하게 숙고하고 차근차근 진행하기를 바랍니다. 정원은 자연과 시간이 만듭니다.”

조팝나무, 중산국수나무 , 줄장미 등을 식재한 일월수목원 장식정원. 수원=김선미 기자

정원에는 사랑과 인내와 미학이 깃들어 있습니다. 만남과 헤어짐, 희로애락에 요동치는 마음을 정돈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변하는 모든 계절의 순간이 은혜라는 걸요. 그 정원에서 당신과 오래오래 추억을 쌓고 싶습니다.


수원=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