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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흉이 공존하는 한남동 부촌

입력 | 2024-01-06 16:45:00

[안영배의 웰빙 풍수] 재벌가 품은 강력한 명당이면서 유해한 기운도 남달리 센 곳




한남동 부촌, 정확히는 재벌과 갑부가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과 이태원동 일부는 부자를 꿈꾸는 이들의 로망으로 꼽히는 곳이다. 한남동 부촌은 그곳에 산다는 사실만으로도 특권 의식과 성취감을 부여하는 명소다.

표준단독주택 공시가격 상위 10위권 내 주택이 다수 위치한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일대. [뉴시스]

성공한 기업인이 흔히 그러하듯 영업사원 출신으로 30대 그룹 반열까지 올라선 Y 회장도 한남동 부촌에 입성했다. 그는 2007년 서울 한남동 1089㎡(약 330평) 대지에 집을 지었다.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사는 집과 대문을 마주하는 이웃집이었다. 그런데 그전까지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을 거둬 ‘성공 신화’의 표상이 된 Y 회장은 한남동 집으로 이사한 후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사한 바로 그해에 건설회사를 인수했다가 부동산 경기침체로 유동성 위기에 빠져 지주회사까지 법정관리를 받는 등 수난을 겪어야 했다. Y 회장 자신도 불공정거래 혐의로 금융당국이 검찰에 고발하는 등 곤경을 겪었다. 결국 Y 회장은 한남동으로 이사한 지 6년 만인 2013년 한남동 생활을 청산했다.

한남동 부촌에서 최고 조망권을 자랑하는 ‘뷰(view) 명당’ 집에 살던 기업인 L 씨 역시 낭패를 본 경험이 있다. 그는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고, 한남동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배기 집으로 이사했는데 한남동 생활 이후 사업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풍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살던 집터가 사업뿐 아니라 건강도 해칠 수 있다는 조언을 듣고서는 강남으로 되돌아갔다.

두 경우 모두 집터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풍수 사례에 해당한다. 양택(집)풍수의 고전 ‘황제택경’은 “(조상의) 무덤이 흉해도 집터가 길하면 자손이 부귀를 누리고, 무덤이 길하지만 집터가 흉하면 자손이 먹고사는 것조차 힘들게 된다”고 말한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부촌 집은 대부분 보는 이에게 위압감을 줄 정도로 웅장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안영배 제공]

한남동은 실제로 아무나 넉넉히 품어주는 곳은 아니다. “명당 옆에 흉당이 있다”는 속언처럼 이곳에는 길지(吉地)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명당과 한 끗 차이로 살기(殺氣)가 형성된 땅, 가파르거나 모양이 삐뚤어진 땅, 건강을 해치는 음기(陰氣)가 뻗친 땅 등 생활하기에 적절치 못한 곳이 바다의 암초처럼 퍼져 있다.

지나친 부의 과시가 화근이 된 경우도 있다. 한남동 부촌 집은 대부분 보는 이에게 위압감을 줄 정도로 웅장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유명한 건축가의 설계에 따라 지은 일부 부잣집은 가상(家相) 자체가 불편함마저 준다. 남들보다 돋보이게 집을 지으려다 보면 집 외관이 기이하거나 날카로워질 수 있다. 현재 집안 식구 간 다툼으로 골머리를 앓는 모그룹 회장 집은 풍수적으로 분란과 반목을 자아내는 생김새를 하고 있다.



묘지에서 별장으로 변신
이처럼 한남동은 부자에게나 일반인에게나 그리 만만한 땅은 아니다. 이는 한남동 지형과 역사에서도 드러난다.

북쪽 남산을 베개 삼고 남쪽 한강으로 쭉 뻗어 있는 지형인 한남동은 전형적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길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동쪽으로는 매봉산이 청룡(靑龍) 역할을 하면서 한강변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을 막고, 서쪽으로는 남산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이 이태원동 언덕길을 이루면서 백호(白虎)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3면을 산이 아늑하게 감싸다 보니 조선 왕조도 이곳을 길지로 보아 능터로 정하기도 했다. 현 한남초 일대가 과거 ‘능터골’로 불린 배경이다.

그러다 보니 한남동과 이태원동 일대는 조선 중기 이후 공동묘지로 사용돼온 것으로 전해진다. 대일항쟁기인 1912년에는 일제가 이태원동 일대 169만2000㎡(약 51만1830평)를 공동묘지로 지정했고, 1924년 용산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제작한 병영지도에도 한남동 일대가 일본군 육군묘지로 표기돼 있다. 2022년 리움미술관 근처 땅에 삼성가가 저택을 짓다가 60여 기의 이름 없는 무덤이 나와 건축이 잠시 중단됐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처럼 망자들의 쉼터였던 이곳은 1930년대 들어 일본인의 교외 주택가로 변신하게 된다. 조선에서 돈을 벌어들인 일본인들이 풍광 좋고 한적한 곳에 별장을 마련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 동호(東湖)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물과 산의 풍광이 수려한 곳이기도 했다. 조선 왕들은 매봉산에서 매사냥을 하면서 이곳 풍치를 즐겼다. 특히 세종대왕은 관리들을 위한 여름 휴양지이자 공부 공간으로 매봉산 기슭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세우기도 했다.

일제의 대경성 도시계획에 따라 한남동 일대는 주택가로 개발되면서 대변신을 하게 된다. 당시 이곳은 경성(서울)의 남쪽이라 경남(京南)으로 불리며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다. 1938년 형성된 남산주회도로(이태원로)는 남산 중턱에서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여 드라이브 코스 등 나들이 명소로도 인기가 높았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옛 일본군 병영이던 용산 자리에 미8군이 주둔하면서 인근 이태원동과 한남동은 미8군 배후지가 됐다. 이에 유엔빌리지와 한남외인아파트 등으로 외국인이 몰려들었고, 각국 대사관과 대사관저가 속속 들어섰다.

주요 기관장의 공관이 모여 있는 한남동 일대. [뉴스1]

풍수적으로 한남동 지형을 살펴보면 좌청룡인 매봉산 지역과 우백호인 이태원동 고갯길 쪽은 다소 차별화된 양상을 보인다. 권력 혹은 무력을 상징하는 좌청룡(매봉산 자락)에는 대통령 관저를 비롯해 국회의장, 대법원장, 육군참모총장 등 권력기관의 공관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또 주변에 이탈리아, 스페인, 인도, 이란, 불가리아 등 주한 외국대사관도 많이 들어서 ‘한남동 공관촌’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반면 복록, 재물 등을 상징하는 우백호(이태원동 고갯길) 지역은 좌청룡보다 상대적으로 재벌가가 많이 모여 살고 있다. 1970년대 이후부터 삼성, 신세계, LG, SK, 대상, 부영 등 대기업 총수 및 가족이 이곳에 집중적으로 모여들었고, 삼성가의 경우 ‘패밀리 타운’을 형성했을 정도다.



전원형 부촌의 명과 암
한남동 부촌에 사는 부자들이 은근히 풍수에 신경 쓰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치도 있다. 삼성이 2004년 건립한 리움미술관 입구에 새겨진 동판 글귀다. “우리는 대지모신(大地母神)의 혜려(惠慮)에 힘입어 문화창달(文化暢達)을 위해 미술관을 세웠습니다. 그 뜻을 가상히 여기시어 이 일에 참여하였고 앞으로 참여할 모든 이들에게 기쁨을 내려주시옵소서.” 땅의 신을 향한 이 기원문은 건물을 짓느라 남산을 훼손하는 데 대한 일종의 풍수적 비보 조치로 해석된다.

전반적으로 한남동 부촌은 ‘전원형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속세와는 떨어진 곳에서 풍광과 여유로움, 사생활을 보장받으려는 욕구가 반영된 땅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지역은 일반과는 거리를 두는 폐쇄성과 고립성을 띠게 된다. 경제적 수준이 비슷한 이들끼리 군집을 이뤄 배타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부촌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부를 일정 수준 이상 이룬 이들이 부를 유지하거나 관리하는 정도가 땅의 성격과 어울린다고 할 것이다.

이는 한창 부를 축적하고 쌓아가고자 하는 이에게는 한남동 땅이 맞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부를 축적하는 행위는 폐쇄나 고립과는 성격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한남동 부촌에서 50년간 살아온 한남동 토박이 B 씨는 “이곳에서 흥한 사람도 있지만 망해 나가는 기업인을 적잖게 봤다”면서 “이곳 터가 세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한남동 부촌은 한국 재벌들을 품안에 들일 정도로 강력한 명당 터이긴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유해한 기운도 남달리 센 곳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즉 한남동은 흥망성쇠가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터이니 풍수적으로 잘 살펴야 한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22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