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배의 웰빙 풍수] 재벌가 품은 강력한 명당이면서 유해한 기운도 남달리 센 곳
한남동 부촌, 정확히는 재벌과 갑부가 집중적으로 모여 사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과 이태원동 일부는 부자를 꿈꾸는 이들의 로망으로 꼽히는 곳이다. 한남동 부촌은 그곳에 산다는 사실만으로도 특권 의식과 성취감을 부여하는 명소다.
표준단독주택 공시가격 상위 10위권 내 주택이 다수 위치한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일대. [뉴시스]
한남동 부촌에서 최고 조망권을 자랑하는 ‘뷰(view) 명당’ 집에 살던 기업인 L 씨 역시 낭패를 본 경험이 있다. 그는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고, 한남동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배기 집으로 이사했는데 한남동 생활 이후 사업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풍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살던 집터가 사업뿐 아니라 건강도 해칠 수 있다는 조언을 듣고서는 강남으로 되돌아갔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부촌 집은 대부분 보는 이에게 위압감을 줄 정도로 웅장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안영배 제공]
지나친 부의 과시가 화근이 된 경우도 있다. 한남동 부촌 집은 대부분 보는 이에게 위압감을 줄 정도로 웅장한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유명한 건축가의 설계에 따라 지은 일부 부잣집은 가상(家相) 자체가 불편함마저 준다. 남들보다 돋보이게 집을 지으려다 보면 집 외관이 기이하거나 날카로워질 수 있다. 현재 집안 식구 간 다툼으로 골머리를 앓는 모그룹 회장 집은 풍수적으로 분란과 반목을 자아내는 생김새를 하고 있다.
묘지에서 별장으로 변신
이처럼 한남동은 부자에게나 일반인에게나 그리 만만한 땅은 아니다. 이는 한남동 지형과 역사에서도 드러난다.그러다 보니 한남동과 이태원동 일대는 조선 중기 이후 공동묘지로 사용돼온 것으로 전해진다. 대일항쟁기인 1912년에는 일제가 이태원동 일대 169만2000㎡(약 51만1830평)를 공동묘지로 지정했고, 1924년 용산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제작한 병영지도에도 한남동 일대가 일본군 육군묘지로 표기돼 있다. 2022년 리움미술관 근처 땅에 삼성가가 저택을 짓다가 60여 기의 이름 없는 무덤이 나와 건축이 잠시 중단됐던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처럼 망자들의 쉼터였던 이곳은 1930년대 들어 일본인의 교외 주택가로 변신하게 된다. 조선에서 돈을 벌어들인 일본인들이 풍광 좋고 한적한 곳에 별장을 마련하려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일대는 조선시대에 동호(東湖)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물과 산의 풍광이 수려한 곳이기도 했다. 조선 왕들은 매봉산에서 매사냥을 하면서 이곳 풍치를 즐겼다. 특히 세종대왕은 관리들을 위한 여름 휴양지이자 공부 공간으로 매봉산 기슭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세우기도 했다.
일제의 대경성 도시계획에 따라 한남동 일대는 주택가로 개발되면서 대변신을 하게 된다. 당시 이곳은 경성(서울)의 남쪽이라 경남(京南)으로 불리며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다. 1938년 형성된 남산주회도로(이태원로)는 남산 중턱에서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여 드라이브 코스 등 나들이 명소로도 인기가 높았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옛 일본군 병영이던 용산 자리에 미8군이 주둔하면서 인근 이태원동과 한남동은 미8군 배후지가 됐다. 이에 유엔빌리지와 한남외인아파트 등으로 외국인이 몰려들었고, 각국 대사관과 대사관저가 속속 들어섰다.
주요 기관장의 공관이 모여 있는 한남동 일대. [뉴스1]
전원형 부촌의 명과 암
한남동 부촌에 사는 부자들이 은근히 풍수에 신경 쓰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치도 있다. 삼성이 2004년 건립한 리움미술관 입구에 새겨진 동판 글귀다. “우리는 대지모신(大地母神)의 혜려(惠慮)에 힘입어 문화창달(文化暢達)을 위해 미술관을 세웠습니다. 그 뜻을 가상히 여기시어 이 일에 참여하였고 앞으로 참여할 모든 이들에게 기쁨을 내려주시옵소서.” 땅의 신을 향한 이 기원문은 건물을 짓느라 남산을 훼손하는 데 대한 일종의 풍수적 비보 조치로 해석된다.전반적으로 한남동 부촌은 ‘전원형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속세와는 떨어진 곳에서 풍광과 여유로움, 사생활을 보장받으려는 욕구가 반영된 땅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지역은 일반과는 거리를 두는 폐쇄성과 고립성을 띠게 된다. 경제적 수준이 비슷한 이들끼리 군집을 이뤄 배타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부촌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은 부를 일정 수준 이상 이룬 이들이 부를 유지하거나 관리하는 정도가 땅의 성격과 어울린다고 할 것이다.
이는 한창 부를 축적하고 쌓아가고자 하는 이에게는 한남동 땅이 맞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부를 축적하는 행위는 폐쇄나 고립과는 성격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한남동 부촌에서 50년간 살아온 한남동 토박이 B 씨는 “이곳에서 흥한 사람도 있지만 망해 나가는 기업인을 적잖게 봤다”면서 “이곳 터가 세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한남동 부촌은 한국 재벌들을 품안에 들일 정도로 강력한 명당 터이긴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유해한 기운도 남달리 센 곳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즉 한남동은 흥망성쇠가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터이니 풍수적으로 잘 살펴야 한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22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