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퇴직한 현재의 모습 받아들이고 둘째, 독서-운동 등 규칙적 루틴 만들길 셋째, 계획 세우되 조급한 실행은 금물 중심부터 잡고 기나긴 싸움 승부수를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그러는 사이 퇴직 후의 나는 퇴직 전 결심했던 모습과는 점차 멀어져 갔다. 생각은 많은데 무엇 하나 결정하지 못했다. 소소한 다짐이라도 실천해 보면 좋으련만 환경 탓만 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냈다. 다시 떠올려 보아도 후회가 많은 부분이다. 이후 오랜 방황이 시작된 것 같아 속상한 마음이 든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혹여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이 계시다면 퇴직 후 삶을 계획하는 데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다.
나 역시 퇴직 초기에 내가 회사에서 어떤 잘못을 했는지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 끝에 발견한 내용을 곱씹으며 자신을 위안했다. 심지어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애써 설명하기까지 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데 스스로 대변하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는 홀로 외치는 의미 없는 아우성이었다. 그래서 상처도 깊었던 것 같다. 되뇔수록 서운한 감정이 떠올랐고 이는 나로 하여금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지게 만들었다. 말끔히 잊고 다시 시작했으면 덜 버거웠을 텐데 지난날에 연연하느라 두 발을 내 손으로 묶어 버렸다. 부디 나와 같이 자신을 괴롭히는 행동은 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지나고 보니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다.
둘째, 긍정적인 루틴을 만들어 보자. 나는 퇴직 후 다음 날 아침이 정말 당황스러웠다. 여느 때와 같은 시간에 눈을 떴지만,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퇴직 통보를 받은 사실이 꿈처럼 느껴졌고 출근하지 않는 게 맞는지도 의아스러웠다. 이내 상황 파악은 했지만 뒤이어는 오갈 데 없는 하루가 고민이었다. 마땅히 할 일이 떠오르지 않아 온종일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이후로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생활 패턴이 느슨해졌고 그러다 어느새 날짜 감각까지 잃어버렸다.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잠시의 편안함은 금세 나태함이 됐다. 뒤늦게 아니다 싶었지만 이미 좋지 않은 습관이 몸에 밴 뒤였다.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다시 올바른 습관을 잡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나와 달리 퇴직 후에도 자신만의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분들을 뵐 때가 있다. 신기하게도 그분들은 모두 비슷한 공통점을 가지고 계셨다. 루틴, 직장인 시절과 다름없는 생활의 루틴이었다. 기상과 취침, 평일과 휴일 등 나름의 일정한 규칙 안에서 움직이셨다. 그 시기와 다른 점은 회사 일이 자신의 일로 바뀐 것뿐이었다. 독서, 운동과 같은 자기 계발을 포함해 열심히 두 번째 길을 닦고 계셨다. 불규칙하고 계획 없이 흥청망청 세월을 낭비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야는 달라도 한결같은 모습에서 생활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셋째, 조급한 마음을 버리자. 회사를 떠나면 마음이 급해지기 마련이다. 현실적인 문제로 또는 타인의 시선 때문에, 저마다의 목적은 달라도 쫓기는 기분은 매한가지다. 그렇지만 성급하게 시작한 일의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 회사 밖 경험이 충분치도 않은데 제대로 따져 보지도 않고 일을 시작한다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 이는 배고프다고 때가 되기도 전에 밥솥을 미리 여는 것과 같다. 밥이 설익으면 맛도 나지 않고 심지어는 아까운 쌀도 버리게 된다. 어떤 계획이든 전후 상황을 둘러보고 차분한 판단이 가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조급함을 결단력이나 실행력으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모든 퇴직자에게 퇴직 이후의 삶은 힘겹고 고독하다. 무엇보다 자기와의 기나긴 싸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퇴직 초반이 어느 시기보다 중요하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생활할지 중심을 잡아야 후회 없는 삶을 만들 수 있다. 그 작은 결단과 실천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퇴직자의 회사 밖 모습은 퇴직 전에 가졌던 회사의 직급이 결정하지 않는다. 오롯이 스스로 만드는 자기 관리의 결과다.
퇴직자들은 이미 정글 같은 회사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낸 사람들이다. 하지만 회사 밖 세상은 황량하고 척박한 사막과 같다. 정글과 사막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정글에서 살아남았다고 사막에서의 생존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갑진년 새해, 새로운 출발을 앞둔 퇴직자들에게 청룡의 기운이 깃들길 바라본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