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터칼 테러’ 박근혜 대수술 후 “오버 말라” 회자 범인 당적, 헬기 이송 논란… 테러 본질은 아냐 증오, 폭력으로 정치의견 표출하는 현상이 문제 정치 지도자, 지지층 향해 ‘품격과 절제’ 촉구해야
정용관 논설실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흉기 피습을 접했을 때 많은 이들은 18년 전 박근혜 커터칼 테러를 떠올렸을 것이다. 당시엔 별로 부각되지 않았던 일화 한 토막이 최근 회자됐다. 박 전 대통령이 60바늘을 꿰매는 대수술 끝에 내놓은 첫마디가 흔히 기억하는 “대전은요?”가 아니라 “오버하지 마세요”였다는 것이다. 직접 들은 사람이 몇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발언들의 진위를 일일이 따질 일은 아니지만 “오버 말라”는 언급 자체는 이 대표 사건과 맞물려 흥미를 끌게 한다.
맥락은 다를 수 있지만 이 대표 사건 직후 여야 지도부가 “과잉 대응 말자”며 절제된 모습을 보이려 한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 “(피의자의) 당적 여부가 사건의 본질이 아니다”라고 한 민주당 원내대표 발언은 의미 있게 들렸다. 범인이 민주당 당원이라면 민주당의 자작극, 국민의힘 당원이라면 국민의힘 배후설 같은 선입견을 갖게 할 수 있다는 취지의 설명도 설득력이 있었다. “내가 피습당한 것처럼 생각해 달라”는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발언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는 여야 모두 섣불리 문제적 발언을 내놓았다가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인 듯 보인다. 그래서일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양 진영에서 각종 음모론과 배후설이 확산되고 있지만 여야 지도층이 지지자들을 향해 강력하고 묵직한 제어의 메시지를 던지지 않고 있다. 여든 야든 짐짓 점잖은 척하며 내심 여론 지형이 유리하게 흐르길 기대하는 눈치 아닌가.
그래도 이는 의료계 차원에서 ‘짚고 넘어갈’ 문제이지 정치적 소재로 삼는 걸 지켜보는 것은 불편하다. 목 부위는 급소 중의 급소다. 백주에 자신의 목 부위를 괴한의 칼에 기습적으로 찔렸다고 상상해 보라. 생사의 문제다. 응급환자였던 만큼 부산대병원의 1차 판단에 맡겼어야 했다는 아쉬움과 함께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총탄을 맞고 수술대에 올라 의사들에게 “당신들이 공화당원이길 바란다”는 조크를 건넸다는 에피소드도 떠오른다. 결과론적 얘기다. 급박했던 순간 전원 결정은 이 대표만 할 수 있었고, 담대하지 못했느니 하는 세간의 평가도 이 대표의 몫일 게다.
서울대병원 전원을 두고 ‘충청도 핫바지론’처럼 부산 민심이 출렁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한편에선 총선 전 1심이 나올 것으로 전망됐던 ‘검사사칭 위증교사’ 사건의 재판이 미뤄지며 이 대표에겐 호재라는 분석도 있다. 이 대표의 처신이 적절했는지, 내로남불인지 등을 떠나 현 시점에서 이번 사건이 어느 쪽에 플러스가 되고 마이너스가 될지 정치공학 차원에서 주판알을 두드리는 것은 중요치 않다. 그저 총선 시계가 잠시 멈췄을 뿐이고 곧 재개될 것이다.
이번 사건의 본질은 피의자의 당적도 아니고 서울대병원 전원도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저주의 언어가 판을 치고, 그 사이 자신만의 허구에 빠져 살의(殺意)까지 품게 된 어느 외로운 늑대의 문제다. 토론과 비판은 실종되고 폭력까지 써가며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려는, 갈수록 극단화하고 있는 한국 정치의 문제다. 공통체의 가치를 결집하는 논의의 품격이 허물어진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이 대표 측도 경찰도 병원도 훨씬 투명할 필요가 있다. 수사 상황, 치료 상황에 대한 비밀주의는 제2, 제3의 음모론만 부추길 뿐이다.
머지않아 퇴원할 이 대표가 무슨 메시지를 내놓을지가 궁금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테러는 민주주의 적(敵)”이라고 했다. 국가 질서 유지자로서 좀 더 구체적이고 강력한 메시지가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 대표는 피해자로서 총선 득실을 염두에 둔 메시지를 내놓을까, 자기 성찰이 담긴 미래지향적 메시지를 내놓을까. 정치권이든 유권자든 ‘지나침’을 경계해야 할 때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