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양정은 심리 상담사
한국에서는 매일 36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매일 92명이 자살을 시도해 응급실에 실려 갑니다. 한국은 죽고 싶은 사람이 정말 많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 곳곳에는 죽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죽고 싶은 당신에게’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연재물입니다. 지친 당신이 어디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도 함께 담겠습니다. 죽고 싶은 당신도 외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아이는 예쁜데 자꾸 눈물이 나요.”
7년 전, 첫 아이를 낳은 지 100일쯤 됐을 무렵 심리상담센터를 찾은 엄마의 첫마디였다.
아이는 엄마에게 축복이었다. 아이를 품에 안으면 사랑과 행복으로 충만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는 자주 눈물을 흘렸다. 밥을 먹다가, 설거지하다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동요를 불러주다가 우는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밤에 잠들고 나면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엄마에게 찾아온 산후우울증이었다.
5살, 7살 두 딸을 둔 양정은 씨(39)는 첫 아이 출산 후 산후우울증을 겪고 심리 상담과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았다. 산후우울증은 출산 후 호르몬의 변화와 스트레스, 부담감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우울과 불안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 질환이다. 산후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엄마가 자녀를 살해한 뒤 자살하는 안타깝고 끔찍한 사건도 종종 발생하곤 한다.
첫 아이 출산 후 겪은 산후우울증을 극복한 양정은 심리 상담사. 양 씨 제공.
● 나에게 출산은 ‘수습 기간 없이’ 들어간 직장
양 씨는 첫 아이 출산을 ‘수습 기간 없이 들어간 직장’이라고 표현했다. 일에 적응할 시기 없이 바로 담당자가 된 엄마. 출퇴근 시간은 없고 상사는 울음으로 모든 것을 지시하는 직장. 다들 추천하면서 ‘언제 들어갈 거냐’고 묻기만 했을 뿐 아무도 그 이후의 현실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첫 아이를 낳은 뒤 양 씨는 크고 작은 변화 속에서 커다란 감정의 진폭을 경험했다.―아이를 낳고 어떤 감정의 변화를 겪었나요.
“일단 출산 이후에 변해버린 제 몸이 흉하게 느껴졌어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을 뛰어넘는 변화들이었어요. 스스로와 한 여러 다짐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마다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완모(완전 모유 수유)를 해야지. 아이가 울면 잘 다독여야지’와 같은 다짐을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불안했어요.
아이가 쉽게 잠들지 않거나, 열심히 만든 이유식을 잘 먹지 않아서 내가 잠깐이라도 쉴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아이의 존재 자체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아이를 위해 쏟은 내 모든 노력이 헛수고처럼 느껴졌어요. 주변 엄마들 수십명에게 ‘원래 이렇게 계속 눈물이 나고 우울한 거냐’며 묻고 또 묻다가 전문가의 상담과 약물치료를 받기로 결심했습니다.”
“엄마가 된다는 건 여성에게 기쁘고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신체적으로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죽음에 가까워지고 심리적으로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는 일이기도 해요. 생존을 위해 존재하는 아기의 요구에 응하는 생활이 당연해지면서 점점 더 공허해지고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됐어요.
제게는 가장 큰 상실이 ‘과거의 자유로운 삶’이었습니다. 온전히 한 인간을 책임져야 하는 무게를 짊어지기 전 자유로웠던 과거가 그리웠어요. 내 시간과 에너지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통제감에 대한 상실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늘 생각했어요. ‘나는 왜 이렇게 다른 엄마들처럼 씩씩하지 못할까? 강하지 못할까?’ 스스로를 비난하면서 우울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출산 후에 이런 상실감을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애도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출산을 애도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이 새롭습니다. 출산 이후에 어떻게 건강한 애도를 할 수 있는 걸까요.
“건강한 애도의 첫 번째는 상실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둘째 아이를 낳은 뒤 제가 산후우울증을 겪지 않을 수 있었던 건 현실을 받아들인 덕분인 것 같아요. 당분간은 이전의 일상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비난하기보다는 나의 감정과 마음을 존중하려고 노력한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 완벽하지 않은 엄마라도 괜찮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 괴로움에 빠지는 엄마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맞아요. 제가 엄마들에게 자주 하는 말 중에 ‘완벽한 엄마가 되려 하지 말고 충분히 좋은 엄마가 돼라’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사실 애매모호하죠. 과연 어느 정도가 ‘충분한’ 건지요. 그 기준을 스스로 세우는 연습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기존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좋은 엄마가 어떤 엄마인지를 먼저 생각해보세요. 아이를 울리지 않는 엄마, 아이에게 늘 웃어주는 엄마, 항상 좋은 재료로 예쁜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는 엄마 등등…. 그리고 이게 정말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논리적으로는 타당한지 생각해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를 울리지 않고 항상 웃어주는 엄마가 되는 게 정말 가능하고 또 아이에게 좋은 일일까요? 아이가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만족만 느껴서는 안 됩니다. 좌절을 인내하고 욕구를 조절하는 방법도 배워야 좋은 어른이 됩니다. 엄마가 아이의 모든 욕구에 바로 반응해서 그것을 모두 충족시켜주려고 애쓰고 희생하는 건 정작 아이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 엄마들은 아이가 조금만 울거나 아파도 자책하고, ‘내가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쉬지 못하곤 하죠.”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아야겠군요.
“아이를 완벽하게 만족시켜야 한다는, 다소 비합리적인 그 신념을 좀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완벽한 엄마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떤 면에서는 이렇게 애를 쓰고 있으니 충분히 좋은 엄마야’라고 판단할 근거들을 스스로 잘 찾아본다면 좋겠습니다.”
● 엄마의 당연한 희생으로 끝나지 않아야
―산후우울증을 겪는 엄마의 주변 사람들은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일단 ‘힘들다’고 말하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자체로 수용해준다면 큰 힘이 될 겁니다. ‘남들도 다 하는 일이잖아. 출산은 네가 선택한 일이잖아’라거나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다’라는 반응이 나오는 순간 대화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많은 것이 바뀌어야겠죠. 산후우울증은 엄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남편이 아무리 가정적이고 좋은 사람이더라도, 제시간에 퇴근할 수 없는 직장을 다닌다면 힘들어하는 아내를 돕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애는 와이프가 보는데 왜 네가 일찍 퇴근하냐. 한잔만 하고 들어가라’ 같은 권유를 거절하는 게 왠지 좀스러워 보이는 조직문화 속에서 남편이 아내의 곁에 잘 있을 수 있을까요?”
―지금 산후우울증을 겪고 있거나 출산을 준비 중인 여성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엄마들을 대부분 자신의 감정에 의문을 던집니다. ‘아이를 낳고 행복을 느껴야 하는데 저는 왜 눈물이 날까요? 제가 이상한 엄마인 걸까요? 제가 너무 예민한가요? 제가 지금 이래도 되나요?’ 하고요. 하지만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타당하고, 충분히 그럴만해서 그런 것이니 의문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먼저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누군가 제게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를 묻는다면 전 항상 산후우울증을 앓던 시기라고 대답할 만큼 제게는 한이 쌓인 시기였어요. 그 당시만 해도 이 세상 누구도 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에 마음속이 처절한 외로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제가 평생 그렇게 살 줄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두 아이가 어느덧 많이 자라 제가 슬퍼 보이면 토닥이는 시늉도 할 수 있는 어린이가 됐어요.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지지받으면서 다른 엄마들과는 아픔을 공유하는 경험을 통해 제 상처가 조금씩 나아지는 걸 느꼈습니다. 지금 너무 힘들더라도 이 시기 역시 잘 지나갈 수 있으니, 자신을 믿고 스스로를 한번 더 토닥여준다면 좋겠습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죽고 싶은 당신에게’ 시리즈의 다른 기사들은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donga.com/news/Series/70030000000942
김소영 기자 ks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