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활주하는 순간 어떤 이는 설렘과 기대에 부풀지만 어떤 사람은 초조함과 두려움에 휩싸인다. 비행기가 이착륙하거나 난기류를 지날 때 단순한 불안감을 넘어 신체 이상을 초래하는 극심한 불안을 느끼는 게 ‘비행 공포증’이다.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리거나 현기증, 질식감 같은 이상을 느끼고 심하면 기절하거나 심장 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 성인 10명 중 1명이 겪는 흔한 질병이라는데 국내엔 집계된 수치가 없다. 미국에선 2500만 명이 비행 공포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해외 출장이 잦은 사람이 아니라면 1년에 비행기 탈 일이 몇 번 되지 않아 과소평가되지만 비행 공포증은 일상은 물론이고 직업을 위협할 만큼 문제가 되는 병이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한 시간 남짓 비행하는 제주도 여행도 망설이게 되고, 심하면 아예 비행기 탑승을 거부한다. 네덜란드 축구의 전설적 공격수 데니스 베르흐캄프는 비행 공포증 때문에 자동차, 배, 기차로 방문 경기를 다녔다. 비행기를 못 타 연봉 협상에서 손해를 보기도 했다. 북한의 김정일이 모스크바를 오갈 때 왕복 24일에 걸쳐 기차를 탄 것도 이 병 때문이라고 한다.
▷비행기 사고는 극히 드물어 걸어 다니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자동차의 65분의 1, 상업용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2억 명당 1명꼴이다. 하지만 비행 공포증을 앓는 사람들은 이를 몰라서가 아니라 사고가 나더라도 내가 대처할 수 없다는 통제의 상실에 더 큰 불안을 느낀다. 폐소 공포증이나 고소 공포증, 공황 장애 같은 불안 장애와 얽혀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른 불안 장애와 마찬가지로 비행 공포증도 피하지 않고 약물, 노출 치료 같은 전문 치료를 받는 게 필요하다. 미국, 유럽 항공사들은 오래전부터 공포증을 완화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승객들이 이륙 때 눈을 감고 음악에 맞춰 명상을 하거나 공항에서 개, 토끼 같은 동물을 직접 쓰다듬으며 긴장을 낮추는 식이다. 비행 정보를 입력하면 그동안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고 가능성을 예측해주는 앱도 개발됐다. 국내엔 아직 이런 움직임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