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울주군에 지난해 11월 ‘미지의’라는 정원이 문을 열었다. 정원을 인생에 빗댄 10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을 형상화한 메뉴(위)를 만들어 제공한다. 통유리창 건물 내부(아래)에서 정원을 감상하며 문화행사와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사진제공 미지의(김승렬 촬영).
지난해 말 울산에 새로 생긴 어느 정원 측에서 연락이 왔다. “정원주인 이상국 ‘미지의’ 대표와 장석주 시인이 참여하는 정원 토크에 초대합니다. 콘서트와 핑거 다이닝(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도 예정돼 있습니다.”
‘미지의’라는 정원 이름부터 미지의 느낌이었다. 정원 소개문은 이랬다. ‘아직 읽지 못한 책, 들어보지 못한 음악, 처음 만나는 작품, 맛보지 않은 음식, 가보지 않은 정원, 그리고 돌 나무 물이 있는 곳, 미지의.’
지방에 막 문을 연 정원이 유명 시인을 초대하는 토크쇼와 콘서트를 연다는 것도 새로웠지만, 이 설명이 특히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온전한 평온함을 위해 포크와 나이프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핑거 다이닝을 준비했습니다. 미지의 정원 이야기를 담은 메뉴로 천천히 맛을 산책하며 장소를 경험해 보세요.’
정원의 입장권을 살 수 있는 미지의 아트숍이었다. 고급스러운 장소들에서 만날 수 있는 향기가 났다. 정원의 주제인 돌, 나무, 물을 주제로 작가들이 만든 향수와 작품을 파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이상국 미지의 대표와 마주쳤다.
울산 고헌산자락에 비밀의 정원처럼 자리잡은 미지의 입구. 미지의 제공
그가 안내하는 정원의 출입구는 도로를 가운데에 두고 아트숍 맞은편에 있었다. 녹슨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곡선의 통유리 건물, 그 앞에 넓게 펼쳐진 정원(5000㎡)이 보였다. 영남알프스 9봉 중 하나인 고헌산이 폭 감싸는 형세였다. 소나무와 남천, 힘찬 물줄기의 폭포, 그리고 울퉁불퉁한 질감의 우윳빛 돌들…. 정원 바로 옆에 태양을 안고 흐르는 골안못에는 흰뺨검둥오리들이 헤엄쳤다.
세월의 흐름을 그래스로 보여주는 옥상정원. 미지의 제공.
이 대표와 40여 분간 정원을 둘러봤다. 정원은 10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구역마다 시적(詩的)인 이름과 설명이 있었다. 목화, 연화, 지의, 백야, 애추, 비연…. 예를 들면 이끼 공간의 이름은 ‘지의’(地衣)였다. 이끼를 ‘아주 느리게 오랜 시간을 끝맺고 자연으로 되돌아간 땅의 옷’으로 표현했다. ‘목화’ 구역의 설명은 이렇다. ‘긴 침묵을 깨고 돌 위에 스며든 꽃-화려하지 않지만 아름답습니다. 변화할 수 없지만 아주 단단합니다. 세월의 흔적이 아름답게 피어나 자리 잡은 돌꽃입니다.’
이 돌은 오랜세월 동안 무엇을 보고 들었을까. 이 대표가 문경에서 들여온 정원의 목화석.울산=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이 대표에게 물었다.
“정원을 만들 때 제가 가장 신경 쓴 건 존귀한 자연에 부끄럽지 않도록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요하게 명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생각하니 돌이 필요했어요. 그런데 돌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어요. 마음에 드는 돌이 없어 중국에서 수입하려던 찰나 경북 문경에서 찾았습니다. 3200t을 사 왔는데 건물 짓는 비용보다 돌 사는 데 돈이 더 들어갔어요.”
미지의 ‘애추’ 구역. 울산=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정원의 각 공간을 개념화한 게 놀랍습니다.
“제 머릿속에 있던 정원, 어릴 때 뛰어놀던 자연을 담고 싶었습니다. 제 생각을 글로 옮기는 건 장석주 시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난달 29일 울산 울주군 미지의에서 만난 이상국 미지의 대표. 37년 간 양돈사업을 하다가 마음의 위로를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이 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울산=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정원은 어떻게 만들게 됐습니까.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해 울산에서 37년째 양돈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앞만 보며 살다가 마음의 휴식처가 필요해 2018년 이 땅을 샀습니다. 지형이 아름다워 개인 거처를 만들려고 했는데 사회가 점점 피폐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공간을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미지의 옆을 흐르는 골안못. 울산=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정원의 나무들을 전부 산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어린 시절 추억을 더듬게 하는 도토리나무, 싸리나무, 때죽나무, 망개나무, 진달래…. 정원에는 빼어난 수형의 나무들만 있는 게 아니다. 돌 틈에서 피어난 나무도 있고, 벼락 맞은 돌배나무도 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암에 걸리거나, 암보다 심한 아픔을 겪었는데도 가지에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요. 정원의 놀라운 위로와 치유죠.”
미지의 정원에 있는 벼락맞은 돌배나무. 울산=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정원에서 위로와 치유를 받습니까.
“저는 사업하면서 힘든 부분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때 정원에 나와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문명의 틀에 갇혀 그 어떤 깊은 곳을 못 보지 않나 싶습니다. 내가 왜 이토록 아플까 하면 자연이 뭐라고 하겠어요.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을까요. 제 경우엔 비 오는 날 정원을 걷다가 나무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비 오면 어디 들어가 피할 수나 있지. 나는 비가 오면 맞고 때로는 폭풍도 맞으면서 이 자리에 꿋꿋하게 서 있다.’ 그렇게 용기를 얻고 내 미래를 다시 설계해 보는 것, 그것이 자연의 위로 아닐까요.”
미지의가 여느 정원들과 차별되는 점은 공간에 미감(美感)과 스토리를 담은 것이다. 다양한 인생의 면모로 공간을 개념화한 것, 돌 나무 물의 소리를 채집해 공간의 소리를 만든 것, 정원 콘셉트에 맞춰 차, 향, 음식, 가구, 그릇, 브랜드 필름까지 만들어낸 것…. 그동안 미처 깨닫지 못했던 미지의 감각들이 깨어난다.
숲 속에서 식사하는 느낌의 미지의 다이닝 라운지. 미지의 제공
이 대표는 문화 기획사 ‘쿨데삭’의 김성렵 대표와 손잡고 음악 미술 요리 등 각 분야 30여 명의 전문가와 협업했다. 정원 소개서에는 이들의 명단이 마치 영화 엔딩 크레딧처럼 쓰여있다. 정원주가 전문가들의 제안을 적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정원주가 중심을 잡되 부족한 점에 대해서는 마음과 귀를 연다면 “울산의 문화 명소를 만들고 싶다”는 그의 꿈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문화 강좌와 공연이 펼쳐질 계단식 테라스홀. 미지의 제공
이날 계단식 테라스 홀에서는 토크쇼와 작은 콘서트가 열렸다. 관객 10여 명을 향해 조곤조곤 얘기해주고 고요한 음악을 들려주는 시간이었다. 장석주 시인은 “살다가 꺾였을 때 땅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했다. 정원보 음악가는 이 곳의 돌 나무 물을 주제로 한 브랜드 필름 음악을 연주한 뒤,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키야키가 좋아’란 짧은 에세이를 읽어줬다. 누군가에게 미지의 음식은 스키야키였던 것인데, 미지의 정원에 그 글을 들고 와 들려주는 젊은 음악가의 센스가 돋보였다.
이상국 미지의 대표가 장석주 시인, 전은경 브랜드 디렉터와 토크쇼를 진행하는 모습(위)과 정원보 음악가가 돌 나무 물을 주제로 만든 음악을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모습. 울산=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무엇보다 미지의에서 식사는 또 다른 형태의 명상일지 모르겠다. ‘2024 미셰린 가이드 서울’에 등재를 예고 받은 서울 강남의 아시안 노르딕 식당 ‘마테르’의 김영빈 오너셰프는 미지의의 열 개 구역을 각각의 메뉴로 구현했다.
정원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식사할 수 있도록 배치한 미지의 다이닝 공간. 울산=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드라이아이스를 키위 워터에 넣어 생기는 수증기로 안개를 표현한 ‘무념’, 감자칩 위에 곱게 간 계란으로 골안못에 비치는 햇빛을 표현한 ‘심연’, 당근으로 만든 틀 안에 당근 피클과 캔디드 계피를 넣고 제철 꽃으로 윗면을 가드닝한 ‘연화’, 흑임자 파블로바(머렝 디저트)로 돌무더기를 형상화한 ‘애추’…. 놀랍고도 아름다운 메뉴들이다.
돌무더기를 형상화한 흑임자 파블로바와 흑임자 호지차 라떼를 이날 시식에 참석한 김혜준 푸드콘텐츠디렉터가 촬영했다. 손님으로 참석한 김 디렉터는 “안정적인 세련됨이 차별화되는 포인트”라고 평했다.
돌 위로 쌓인 이끼를 알스지 크래커와 차돌박이 김소스로 표현한 메뉴. 미지의 제공(김승렬 촬영)
책자 형태의 메뉴판에는 메뉴 설명뿐 아니라 질문이 한 개씩 쓰여 있다. ‘지금껏 당신의 인생에서 인내 뒤에 찾아온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였나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긴 인생이 되듯 당신이 내딛는 한 걸음에서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통유리창을 통해 정원을 바라보면서, 접시 위에 구현된 또 다른 섬세한 정원을 맛보면서 질문들에 대한 답을 고민하다가 깨닫는다. ‘그래. 정원은 성찰의 공간이었지.’
미지의 옆 골안못에 비친 태양빛. 울산=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울산=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