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처럼 번뜩이는 병주(幷州) 과도, 눈보다 고운 오 지방 소금, 갓 익은 귤을 까는 섬섬옥수.
비단 장막 안은 이제 막 따스해지고, 향로에선 쉼 없이 향훈이 번지는데, 마주 앉아 여인은 생황(笙簧)을 연주한다.
낮은 목소리로 묻는 말. “오늘 밤 어느 곳에서 묵으실는지? 성안은 이미 야심한 삼경, 서릿발에 말이 미끄러질 터니 차라리 쉬었다 가시는 게 좋겠어요. 길엔 나다니는 사람도 드물답니다.”
(幷刀如水, 吳鹽勝雪, 纖指破新橙. 錦幄初溫, 獸香不斷, 相對坐調笙. 低聲問, 向誰行宿? 城上已三更, 馬滑霜濃, 不如休去, 直是少人行.)
―‘소년유(少年遊)’ 주방언(周邦彦·1056∼1121)
시가 정중하고 엄숙한 분위기라면 사(詞)는 경쾌하고 자유분방하다. 시가 사대부 문학의 정수라면 사는 연회나 주루(酒樓)의 여흥 분위기를 돋우는 유흥 문학의 성격이 강하다. 가사의 속성상 근엄한 메시지보다는 평이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써야 호소력이 더 도드라지는 법이다. 노랫말에 고답적인 삶의 이치나 인간의 도리 따위를 담는다면 누가 반기겠는가.
이 작품은 사의 이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연인 사이인지 아니면 주루에서의 하룻밤인지는 알 수 없다. 비단 장막을 두른 것으로 보아 이 방의 주인은 아마 여인, 갓 익은 귤껍질을 벗기는 섬섬옥수의 주인공이겠다. 잘 드는 과도와 백설 같은 소금을 준비한 것으로 보아 시고 쓴맛이 도는 귤 위에 살짝 소금을 칠 모양이다. 길상(吉祥) 동물 형상의 향로에 향을 피우고 생황 연주까지 곁들였으니 그 대접이 여간 곡진하지 않다. 급기야 나지막이 건네는 한마디. ‘야심한 데다 서릿발로 길이 미끄러우니 쉬어가시라.’ 배려인 듯 애소(哀訴)인 듯 여인의 농염한 유혹에 밤이 무르익고 있다. 송 휘종(徽宗)과 기녀 이사사(李師師)의 밀회 장면을 묘사한 거라는 믿기 어려운 야사의 기록도 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