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자녀 가방에 몰래 넣어둔 녹음기로 교사의 발언을 무단 녹음했다면 형사재판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처음으로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11일 아동학대처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초등학교 교사 A 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벌금 5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동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서울 광진구 한 초등학교 교사였던 A 씨는 2018년 3∼5월 담임을 맡은 3학년 학생에게 “학교 안 다니다 온 애 같다”고 하는 등 16차례 정서적으로 학대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학생의 어머니가 자녀 가방에 몰래 녹음기를 넣어 수업 내용을 녹음해 경찰에 증거로 제출했고, 검찰은 이를 근거로 A 씨를 기소했다.
반면 대법원은 “대화 내용이 공적인 성격을 갖는지, 발언자가 공적 인물인지 등은 ‘공개되지 않은 대화’ 여부를 판단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부모가 몰래 녹음한 교사의 수업시간 중 발언은 ‘공개되지 않은 대화’에 해당해 증거 능력이 부정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부모는 수업 중 학생과 별개의 인격체이자,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제3자이기 때문에 교사의 수업 중 발언은 공개되지 않은 대화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학부모가 녹음한 경우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대법원은 A 씨의 발언이 아동학대처벌법이 금지하는 ‘정서적 학대’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선 별도로 판단하지 않았다.
법조계에선 대법원의 이날 판결이 특수교사의 발언을 녹음해 아동학대 혐의로 신고한 웹툰 작가 주호민 씨 자녀 등 쟁점이 유사한 사건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교원단체는 대법원 판결을 환영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입장문을 내고 “학부모가 교사의 교육 활동을 무단 녹음하고 유포하는 것이 명백히 불법임을 밝힌 판결”이라고 반겼다.
장은지 기자 jej@donga.com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