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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칼럼]공무원 ‘복지부동’이 대통령 단임제 때문일까

입력 | 2024-01-14 23:51:00

지금의 ‘공무원 보신주의’ 가장 큰 원인은
대통령제-내각제 등 ‘政體’ 아닌
매번 반복되는 전 정권 비리 털기
‘직권남용죄’ 남용 여부도 숙고해봐야



천광암 논설주간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보신주의에 빠진 관료주의 시스템에 대한 혁신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 단임제에선 정부가 5년마다 바뀌니 공무원이 적당히 시간만 끌며 움직이지 않는다. 차라리 내각제에선 정치세력 교체와 상관없이 차관 중심으로 관료주의가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취지의 발언도 나왔다고 한다.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윤 대통령 생각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다만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대통령실이나 내각에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되는 현실에서, 잘못된 처방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사실관계는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차관 중심 관료주의’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내각제 국가는 일본이다. 표면상 각 부처(일본식으로는 성청·省廳)의 장관은 여당 의원이 맡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인사권을 장악하고 각 부처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장관이 아니라 내부 관료 출신의 사무차관인 경우가 많았다. 사무차관을 정점으로 한 관료집단의 힘이 워낙 세다 보니 일본은 ‘의원내각제가 아니라 관료내각제 국가’라는 개탄이 나왔을 정도다.

이런 시스템의 장점이 주목을 받은 시기도 한때 있었다. 변덕스러운 정치 외풍을 차단함으로써 행정의 일관성을 높였고 공무원의 전문성을 키우는 데도 기여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부처 이기주의와 칸막이 행정 같은 부작용이 순기능을 압도하면서, 관료집단은 가장 시급한 개혁 대상 중의 하나로 꼽히게 됐다.

이에 따라 나온 대표적인 조치가 2014년 내각인사국 설치다. 각 부처별로 관료집단이 틀어쥐고 있던 고위공무원 인사권을 총리와 내각의 수중으로 가져간 것. 이를 통해 개혁으로 첫발은 뗐다고 하지만 ‘망국론’까지 나오는 관료주의의 근본적인 병폐를 수술하기까지는 갈 길이 먼 상황이다.

일본의 예를 보더라도 내각제라고 해서 관료주의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단임제 여부도 마찬가지다. 임기 말이라면 모르겠지만 임기가 3년도 넘게 남은 정권에서 단임제, 중임제 따져가면서 일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공무원이 어디 있겠는가. 원인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관료사회의 보신주의와 무사안일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의 양상을 보면 문재인 정부 초기와 특히 비슷한 측면이 많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함께 거의 전 부처에 적폐청산TF를 꾸려 대대적인 사정 몰이를 했다. 그 과정에서 실무자급 공무원들까지 조사 대상이 되고 심한 경우 징계나 수사 의뢰 대상이 됐다. 그러다 보니 ‘다음 정권에서 책잡힐 일은 하지 말자’는 보신주의가 급속히 확산됐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비슷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해 공무원 피살’ ‘통계 조작’ ‘태양광 비리’ ‘월성원전 폐쇄 결정’ 등에 대한 전방위 수사와 감사가 진행 중이다. 이런 일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데, 어떤 공무원이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명백한 비리나 부정에 대해 눈을 감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4대강 감사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4번, 5번까지 이뤄지는 식의 감사는 공직사회를 움츠러들게 할 뿐 어떤 공감도 얻어내기 어렵다. 정책 판단의 영역까지 사법의 잣대로 재단하려 한다는 논란의 소지를 남기는 것도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을 더 고질화시킬 뿐이다.

특히 현 정부와 전 정부를 가리지 않고 ‘직권남용죄’를 적용해서 공직자들을 수사하거나 기소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숙고해 볼 여지가 많다.

일본에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직권남용죄가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공무원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뇌물이나 횡령과는 달리 추상적인 범죄여서, 주관이 개입할 소지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 검찰은 2017∼2021년 5년간 고소·고발이나 검경의 인지를 통해 4891건의 직권남용 범죄를 접수했는데, 기소는 고작 5건에 그쳤을 정도다. 그나마도 한국처럼 공무원 상하관계에 직권남용죄를 적용해 기소하는 사례는 아예 찾아볼 수 없다.

앞서 보도에 따르면 윤 대통령 발언과 관련한 후속 조치의 하나로 부처 간 칸막이를 허물어 성공한 해외 사례를 찾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내친김에 해외에서 주요 공직자를 개인 비리가 아닌, 정책 결정과 관련해서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하는 사례가 얼마나 있는지도 조사해 보기를 바란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