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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할 만한 일’ 하나가 사람을 살립니다[2030세상/김지영]

입력 | 2024-01-15 23:30:00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어느 밤, 친구와 한강 다리를 산책했다. 오랜만에 만난 벗과 가볍게 오른 취기, 비 기운에 젖은 공기조차 낭만적이었다. 중간쯤 왔을까. 녹색 전화기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힘드신가요?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옆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SOS 생명의 전화’라 쓰여 있었다. 친구가 말했다. “여기서 걸려 오는 전화를 받으면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잠시 침묵이 오간 뒤 내가 반쯤 풀린 혀로 답했다. “나라면! 내일 맛있는 거 먹으면서 얘기하자고 할 거야!”

다음 날, 숙취로 허덕이는 와중에 그 질문이 맴돌았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취기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달리 나은 답변을 떠올릴 수도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나라면 사소한 기대를 심어줄 것이었다. 지금은 힘들지만 너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위로나 그래도 인생은 살아볼 만하다는 식상한 조언 대신. 생명의 숭고한 가치보다는 당장 내일 우리가 함께할 설레는 일에 대해 말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버거운 어떤 날들을 버티는 방식이기도, 듣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사람은, 기대할 만한 일 하나만 있어도 살아져.’ 언젠가 소중한 이에게 했던 말.

하지만 역시 그건 아무래도 가벼웠다. 생면부지 타인의 ‘놀자’는 말에 누군가는 어이가 없어 역정을 낼 것이다. 실제로 저 너머에서 전화를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검색창을 켰다. 눈에 띄는 제목 중에는 이런 게 있었다. ‘아들 잃은 엄마가 새벽마다 SOS 전화 받는 이유.’ 인터뷰에 따르면 12년 차 상담사인 그는 전화를 받으면 가장 먼저 위험한 장소를 벗어나도록 마음을 안정시키고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했다. 지극히 현실적인 답변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들어준다.’ 지옥 같은 마음으로 전화기 앞에 선 나를 상상한다.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거나 털어놓을 자신이 없어서 결국 거기까지 간 나를 상상한다. 연락처를 아무리 내려도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그때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린다’는 녹색 전화기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차라리 다정한 타인이 그리워 수화기를 들 것이다. 누구라도 나를 잡아주길 바라는 처절한 마음으로. 그러니까, 그 장소 그 전화에서의 모범 답안은 따로 있었던 셈이다. 이래서 비전문가가 무섭다.

하지만 한편, 다리 위가 아닌, 녹색이 아닌 수많은 ‘생명의 전화’들을 떠올린다. 경중은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언젠가 한 번쯤 그 전화의 발신자이거나 수신자였다. 그때라면 나의 저 실없는 답변도 조금은 효용을 지닐는지도 모른다. “내일 삼겹살에 소주 어때!” “다음 달에 짧게 여행이나 다녀올까?” 가끔 인생이 너무 길게 느껴질 때, 기대할 만한 일을 스스로 만들거나 만들어준다. 맛난 밥 한 끼, 곧 도착할 택배, 내일 개봉할 영화, 주말의 설레는 만남, 몇 달 뒤의 휴가까지. 고작 기대 하나가 어떤 날의 우리를 살게 한다. 그 크고 작은 기대들을 함께 기워 연명하는 것이 어쩌면 대단치 않은 생존의 기술일까.

끌어내 주어서 끌려 나와 주어서 고맙다, 오늘도.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