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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한국어반 경쟁률 8 대 1… 韓-중동 잇는 일자리 늘자 열풍[글로벌 현장을 가다]

입력 | 2024-01-17 23:39:00

14일(현지 시간) 이집트 카이로의 한국문화원 내 세종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카이로 시민들이 강사의 설명에 집중하고 있다. 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김기윤 카이로 특파원


“‘휴대전화를 ○○○,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쳤다’에서 빈칸에 ‘보다가’와 ‘보고서’ 중 어떤 것이 더 맞는 표현일까요?”(선생님)

“‘보다가’ 같아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 원인과 결과가 나타나요.”(학생들)

14일(현지 시간) 이집트 카이로 한국문화원 내 세종학당.

2024년 첫 학기 개강에 맞춰 학생 10여 명이 중급 이상 ‘한국어능력시험(TOPIK)’ 자격증 취득을 위해 모여 있었다. 서툰 발음과 억양이지만 아는 한국어를 총동원해 단어나 조사의 의미까지 설명하려 애썼다. 흡사 한국의 토익학원이 떠오를 만큼 학생들은 교사의 문제 풀이에 집중했다. 통·번역가나 한국어 강사, 한국 기업 취업, 유학 등 저마다 꿈을 품은 학생들은 “할 수 있다”는 교사의 응원에 다 같이 “파이팅!”이라 크게 외쳤다.》



세계적으로 한국어 배우기 열기가 뜨거운 가운데 북아프리카, 이집트에서도 한국어 강습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K팝이나 한국 영화, 드라마 인기 덕에 이집트 청년들도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무척 크다. 과거엔 그저 취미 차원에서 배우려던 분위기였으나 최근엔 한 발 더 나아가 한-아랍어 통·번역 등 관련 분야를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이 많다. 최근 한국 정부가 ‘제2의 중동 붐’ 투자를 확대하며 한국과 중동을 잇는 일자리도 확실히 늘고 있다.

중동 지역은 젊은층 인구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 어릴 때부터 한국 콘텐츠를 자연스레 접하고 자란 이들의 저변이 무척 넓다. 중동이 한국어 학습 열풍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한국어 교육 인프라를 적극 지원해 양적, 질적 확대를 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어 배우러 왕복 6시간”

지난해 11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2023년 찾아가는 한국문화원’ 행사 중 한국어를 공부하는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엽서에 직접 한글을 쓰며 활짝 웃고 있다. 주이집트 한국문화원 제공 

14일 세종학당에서 만난 수강생들은 한국어 수업을 듣는 것을 “복권에 당첨된 것과 마찬가지”라고 입을 모았다. 이집트에서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교육시설이 적다 보니, 세종학당은 경쟁이 치열해 ‘한국 아이돌 콘서트 티켓’만큼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3년째 평균 경쟁률은 5 대 1로, 이날 개강한 올해 특별학기에도 179명 모집에 1452명이 지원했다. 세계에 산재한 세종학당 중에도 경쟁률이 높기로 유명하다. 2022년과 지난해 모두 연간 지원자가 1만 명이 넘었다. 각각 1860여 명, 2600여 명이 온·오프라인을 통해 강좌를 수강했다. 지난해부턴 강좌 수도 대폭 늘렸지만, 늘어난 수요를 감당하기 쉽지 않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업을 들으러 ‘왕복 6시간’을 다니는 학생도 있다. 마야르 무함마드 씨는 카이로에서 약 200km 떨어진 곳에 살지만 3년째 일주일에 한 번씩 세종학당을 찾고 있다. 그는 “먼 거리지만 세종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 강사나 번역 업무를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집트 밖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등에 진출해 한국 기업에 취직하거나 의료 분야 통역가가 되려는 이들도 많았다. TOPIK에서 가장 높은 6급을 목표로 삼고 있는 림 모사드 씨는 “중동 지역의 한국 기업 주재원이나 한국인 대상 아랍어 강사가 되는 게 꿈”이라 했다. 세종학당의 장은경 교원은 “학생들 열정은 상상 이상이다. 어학 교재뿐만 아니라 한국 신문 기사, 방송 뉴스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려 노력한다”고 했다.

사설 학원도 인기가 높다. 13일 오후 카이로 헬리오폴리스 지역에 있는 한 한국어학원을 찾았더니, 주말인 토요일에도 학생 10여 명이 기초과정을 배우고 있었다. 학생들은 “‘사과하다’에서 ‘사과’는 영단어 ‘애플(apple)’과는 다른 뜻인가요?”라며 손을 들고 궁금한 점을 자유롭게 질문했다. ‘최고’ ‘의자’ ‘회사’처럼 발음하기 어려운 모음이 섞인 단어는 선생님을 따라 큰 소리로 읽었다.

교육시설이 부족한 상황이라 이집트에선 상당히 고액인 한국어 사설학원도 수강생이 많다. 대략 수강료가 한 달 평균 1000이집트파운드(약 4만3000원)로 영어나 프랑스어 외국어학원의 수강료가 300∼400파운드인 것과 비교하면 2.5∼3배에 이른다. 학원 관계자는 “일부 수강생에겐 한 달 수강료가 월급의 3분의 1에 이를 정도지만 어떻게든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열망이 크다”고 설명했다.

출판·웹툰 新시장에 수요 커져
중동 지역에선 한류 붐을 타고 영화나 드라마 등의 자막 번역이 인기가 높은 편. 최근엔 현지가 출판물이나 웹툰, 웹소설 분야의 신(新)시장으로 떠오르며 번역 시장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 작품의 문맥을 이해하고, 현지 아랍권 문화에 맞춰 번역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한국어 교육의 질적 향상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현재 이집트에는 소설가 정유정이나 한강, 조남주, 이민진의 인기작들을 비롯해 김소월 시인의 작품 등 한국 문학 20여 권이 번역 출간돼 있다. 웹툰이나 웹소설 등도 인기를 끌면서 한국 웹툰 기업들이 중동 전용 플랫폼 출시를 앞두고 있을 정도다. 지난해 11월 UAE 샤르자에서 열린 국제도서전에선 셰이크 술탄 빈 무함마드 알 까시미 샤르자 국왕이 한국관을 찾아 “한국 책을 중동에 많이 번역해 출판해 달라”며 관심을 표하기도 했다.

오성호 주이집트 한국문화원장은 “현지인들에게 양적으로 한국어 학습 기회를 늘리는 것만큼, 질 좋은 수업을 통해 고급 인력을 양성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밝혔다. 또 “한국인 강사가 한국어를 가르치는 시대를 넘어서 이젠 현지인 학습자가 다시 현지인을 교육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아랍권은 종교적, 문화적 특수성이 남다르기에 한국인 번역가 못지않게 중동 현지 번역가의 필요성은 갈수록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드라마·영화 30편과 웹툰 3편을 아랍어로 번역한 알레 후세이니 씨는 “일부이긴 하나 성적, 폭력적으로 자극적이거나 동성애 코드가 들어간 작품의 번역은 쉽지 않다”며 “한국 콘텐츠가 아랍권에서 성공하려면 ‘종교 공동체’로 묶인 아랍권 문화를 존중하고, 교리에 맞지 않는 부분은 번역 시 배제할 필요도 있다”고 제안했다. 한국어 수강생들도 “이집트 및 중동 문화권 존중을 위해 논란 소지가 있는 대목은 섬세하게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고교 과목 편입 가능성도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아인샴스대의 통번역 언어대학은 현지 최고의 대학인 카이로대만큼 문과 계열에서 우수한 대학으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2005년 설립된 한국어과는 지원자의 외국어 성적이 만점에 가까워야만 합격이 가능할 정도로 최우수 학생들이 입학한다.

이 대학의 한국어과 2기 출신으로, 이집트 내 ‘한국어 1호 박사’로 통하는 사라 벤자민 한국어과 교수는 “학내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이 모이는 한국어과는 선망의 대상이다. 인기는 앞으로도 오래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 대학의 오세종 한국어과 교수는 “아직 이집트 내에선 한국어과 전공을 둔 곳이 많지 않다”며 “지금처럼 우수한 인재들이 최고조로 모일 때 한국 정부 차원에서 교원 양성, 학과 증설 지원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다만 “무조건적 증설이 아니라 충실한 교육·지원 체계를 확충한 뒤 현지에서 뿌리내리도록 해야 양국에 도움이 될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최근 요르단이나 사우디, UAE 등 대학에 있는 한국어과도 인기가 높아지는 추세다.

이집트 교육부는 지난해와 올해 잇따라 중국어와 이탈리아어를 중고교 제2외국어 선택 교육 과목으로 지정했다. 이집트의 한국어 열풍을 고려하면 앞으로 한국어도 중동 지역 중고교 교육 과목으로 편입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실제로 몇몇 이집트 사립 중고교는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가르치기 위해 카이로한국학교 측에 문의하기도 했다. 오 교수는 “쉽진 않겠으나 불가능한 얘기만은 아니다”라며 “한국 정부, 대사관 측의 외교적 노력과 꾸준한 교원 양성이 바탕이 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김기윤 카이로 특파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