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문화부 차장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말고 그대로 표현하세요.”
한국계 이민자의 삶에 밴 현대인의 고독과 분노를 그려내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BEEF)’이 ‘방송가의 오스카’라 불리는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15일(현지 시간) 작품상과 감독상, 남·여우주연상 등 8관왕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뒀다.
에미상 시상식 무대에서 ‘성난 사람들’이 수상작으로 언급될 때마다 곱씹게 되는 말이 있었다. 지난해 8월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방송영상마켓에서 연사로 나섰던 ‘성난 사람들’의 연출가 이성진 감독의 고백이다.
2008년 데뷔한 그가 당시 ‘어떻게 하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글을 쓸까’를 고민했다는 고백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한국인이라면 단박에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의미와 설명이 담겨 있다. 고작 16년 전 미국 내 한국계 이민자들의 위상과 마치 ‘유리천장’ 같았던 세계무대 속 한국 콘텐츠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주체의 기준에 부합하는 창작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의 고백과 에미상 8관왕 영예가 맞물리며 같은 ‘뿌리’를 지닌 한국인으로서 감동이 배가됐다.
이 작가가 데뷔한 2000년대만 해도 ‘에미상’ 등 미국 대중문화계의 주요 상은 국내 언론사들에는 큰 기삿거리가 되지 않았다. ‘한국’과 관련된 작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5년 국내 언론에서 에미상이 ‘반짝’ 조명된 적이 있는데, 바로 한국 여배우 김윤진이 출연한 미국 ABC TV 드라마 ‘로스트’가 그해 에미상 최우수드라마상 등 2관왕을 차지했다는 뉴스였다. 하지만 한국 작품이 수상의 영광을 얻은 것은 아니었기에 큰 비중으로 기사화되진 않았다.
최근 몇 년 전부터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이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등 주요 상을 휩쓸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세계적인 시상식이 열릴 때마다 한국 관련 작품과 배우들이 주요 상의 후보로 이름을 올리면서 국내 언론사 문화부 기자들 역시 자료 조사는 물론이고 기사를 어떻게 쓸지를 계획하고 지면을 구상한다. 더 이상 ‘에미상’ ‘골든글로브’ 등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K콘텐츠의 세계적 위상으로 한국인이 세계 문화 속 ‘객체’에서 조금씩 ‘주체’로 거듭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드라마 ‘성난 사람들’ 10화의 소제목은 ‘빛의 형상(Figures of Light)’이다. “깨달음은 빛의 형상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 어둠을 알아차림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라는 스위스 정신과 의사 카를 구스타프 융의 문장에서 따온 것이다. 한국적 콘텐츠가 빛을 보게 된 과정 역시 세계 속 주류로 인정받지 못했던 그간의 어두운 시간을 극복하기 위한 많은 창작진들의 노력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다져진 단단함을 바탕으로 향후 활약 역시 ‘반짝’이 아닌 ‘롱런’으로 이어지길 바라본다.
김정은 문화부 차장 kimj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