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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이 밝을수록 별은 사라진다[이정향의 오후 3시]

입력 | 2024-01-23 23:24:00

<78> 앤드루 스탠턴의 ‘월-E’




지구가 쓰레기로 뒤덮였다. 전자폐기물부터 잡다한 쓰레기까지 도저히 처치 곤란이다. 우주 유람선을 운영하는 거대 회사는 여행상품을 출시한다. 5년간 유람선 안에서 휴양을 즐기다 오면 지구가 깨끗이 청소되어 있을 거란다. 모두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난다. 이제 지구엔 월(WALL)-E라는 청소 로봇들만 남았다. 매일 아침 기계 몸을 태양광으로 충전한 후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청소한다. 하지만 700년이 지나도 쓰레기와 오염이 여전해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정향 영화감독

유람선 안에서는 고도의 기술 덕에 걸을 일이 없다. 의자에 앉은 채로 실내를 날아다닌다. 바로 옆 사람과도 직접 대화하기보단 화상채팅을 선호한다. 모두가 심한 비만에 관절도 약하다. 로봇에게 명령만 하고 살아서 몸을 움직여 행동하는 일엔 서투르다. 로봇들의 서비스 속에서 24시간을 살아간다. 모든 걸 로봇에게 맡긴 덕에 남는 시간을 그저 무료하게 보낼 뿐이다. 로봇은 인간보다 완벽하게 일한다. 명령받은 일은 반드시 완수한다. 하지만 덤으로 선심을 쓰는 일은 없다. 상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무리하지 않는다. 공깃밥을 무료로 주거나, 메뉴에 없는 달걀프라이를 해주는 감동은 없다.

전산 시스템이 발달하는데도 오히려 고지서들의 계산 오류가 잦다. 내 경우엔 다 초과 부과였다. 수작업 시절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저희 쪽 실수입니다” 했을 텐데 요즘은 “입력할 때 오류가 있었네요. 전산상의 실수입니다” 식이다. 기계와 일을 나눴기에 잘못도 사이좋게 나눈다. 얼마 전, 우체국 은행 창구에서 돈을 찾았다.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세었는데 만 원 한 장이 부족했다. 금고에 들어가기 전에 기계로 세어놓은 터라 절대 틀릴 리 없다며 창구 직원은 나를 의심했다. 나를 찍은 보안 카메라들을 30분 넘게 확인한 후에야 만 원 한 장을 내밀었다. 사과의 말 대신 “기계는 절대 안 틀리는데…”만 반복했다. 내 양심보다 기계를 더 믿는 그녀 앞에서 만 원을 받는 내 손이 초라했다.

손 글씨로 ‘아름다운’이란 단어를 쓸 때면 마음마저 둥글둥글 부드러워진다. ‘분노’라고 쓸 때는 나쁜 기분이 지글거리며 치솟는다. 동네 병원의 연로한 의사는 지금도 손으로 차트를 쓴다. 환자가 10년 만에 와도 손으로 쓴 차트를 보면 10년 전의 상황이 기억난단다. 초등학교 때 쓴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 고사리 손으로 삐뚤삐뚤 쓴 글씨를 보면 말로 표현 못 할 감흥이 인다. 하지만 컴퓨터에 저장된 일기라면 이런 기분이 들까? ‘저 때는 문장력이 형편없었구나.’ 이런 생각부터 하느라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이 안 보일 거다. 기계에 의지할수록 마음속 무언가가 사라져 간다.





이정향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