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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패전 후 “우리는 희생양”… 독일은 진정으로 반성했을까

입력 | 2024-01-27 01:40:00

전후 10년간 자료 촘촘히 조사… 패전 당시 독일인 심리 파헤쳐
홀로코스트 책임 나치에 전가… 도덕성 무너진 채 약탈 일삼아
아우슈비츠 재판 후손이 주도… “전쟁 세대 스스로 반성 안해”
◇늑대의 시간/하랄트 얘너 지음·박종대 옮김/540쪽·2만8000원·위즈덤하우스



1948년 독일의 한 신문에 실린 그림. 폐허를 딛고 웃고 있는 독일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전후 독일인들은 “내가 너를 빠르게 재건해줄게. 너는 잘못이 없으니까”라는 구호를 외쳤다. ⓒNeue Illustrierte·ⓒOMGUS·위즈덤하우스 제공


“독일인들은 왜 세상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을까?”

1947년 1월 독일 잡지 ‘관점’에 실린 기사의 일부다. 이 기사는 “(독일인들은) 유럽의 문제아이자 세계의 속죄양”이라며 “국제사회에도 일반 가정과 마찬가지로 사랑받는 아이가 있으면 미움받는 아이도 있다”고 지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세계인들이 전쟁의 책임을 돌리기 위해 독일을 과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당시 독일인들은 스스로를 전쟁의 가해자가 아닌 ‘속죄양’으로 생각한 셈이다.

독일 일간지 베를리너 차이퉁 기자 출신으로 현재 독일 베를린예술대 문화 저널리즘 명예교수인 저자는 신간에서 전후 독일인의 심리를 파헤친다. 지금의 독일인들은 나치의 만행을 지속적으로 사죄하고 있지만, 2차 대전 패망 직후 10년 동안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반성하는 독일인의 이미지와는 사뭇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독일이 패망한 1945년 5월 8일로 시계를 돌려보자. 당시 독일은 엉망진창이었다. 전쟁으로 6000만 명이 사망했다. 소련군은 독일을 약탈하고 짓밟았다. ‘기아의 겨울’이라고 불릴 정도로 혹독한 굶주림을 겪었다. 나라 자체가 대혼돈의 상태였다.

연합군 점령 직전 권력 공백기에 독일인들은 약탈에 몰두했다.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 이들은 정부 청사와 창고, 화물열차, 이웃집 등을 미친 듯이 털었다. 암시장에는 횡령하거나 밀수한 물건들이 넘쳐났다. 저자는 이 시기를 ‘늑대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질서에 집착하는 합리적 지성인으로 묘사되는 독일인들이 늑대처럼 서로를 약탈하며 도덕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독일인들은 자신을 전쟁의 ‘희생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는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주도한 것이고, 나치즘에 선량한 독일인들이 희생당했다는 논리다. 저자는 “얼어 죽지 않은 사람은 모두 도둑질을 했다. 모두가 도둑이라면 과연 서로를 도둑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나치당의 체계를 공개한 미군정의 소책자.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은 나치당원의 명부를 손에 넣은 뒤 일부를 독일인들에게 공개했다. ⓒNeue Illustrierte·ⓒOMGUS·위즈덤하우스 제공 

죄책감이 사라진 자리에는 쾌락이 찾아왔다.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하자 영화관이 앞다퉈 문을 열었다. 수많은 댄스홀이 영업을 재개했다. 전후 인구의 5%만 살아남은 쾰른에선 종전 이듬해인 1946년 축제가 열렸다. 학살에 대한 폭넓은 사회적 논쟁은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인들은 전쟁의 기억을 점차 잊어갔다.

독일인들이 과거사 청산에 나선 건 1963∼1968년 ‘아우슈비츠 재판’ 이후다. 아우슈비츠 재판은 나치 치하에서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지만 뉘른베르크 재판(1945∼1949년)에서 단죄받지 않은 독일인 22명을 독일 정부가 기소한 사건이다. 하지만 저자는 아우슈비츠 재판을 자기반성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는다. 1968년 5월 프랑스 학생운동으로 촉발된 이른바 ‘68세대’가 부모 세대에 대해 분노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 저자는 “‘과거 청산’은 훗날 후손들이 떠맡았다. 전쟁 세대는 집단 책임의 비난을 자기 자식들에게 받았다”며 전쟁 세대가 스스로 반성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저널리스트 출신답게 1945∼1955년 10년 동안의 공식 문서, 신문, 잡지, 책 등 다양한 자료를 촘촘하게 분석했다. 독일인 저자가 자국인들의 심리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며 ‘비겁한 독일’에 대한 자기반성을 꾀한 건 인상적이다. 직접 전쟁을 겪은 가해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건 독일인이든 일본인이든 마찬가지 아닐까.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