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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이름이 25字, 라틴어까지… “집값 띄우려다 혼란만” [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24-01-28 23:33:00

신조어 난무하는 아파트 이름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 빛가람 대방엘리움 로열카운티 2차.’

전국 아파트 중 이름이 가장 긴 이 단지 명칭은 총 25자에 이른다. ‘항동 중흥에스클래스 베르데카운티’ 등 서울에서도 두 자릿수의 긴 이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8일 부동산인포에 따르면 전국에서 분양된 아파트 단지명의 글자 수는 2023년 9.86자로 1990년대 4.2자의 2.3배로 늘어났다. 서울시가 2022년 말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0명 중 7명꼴로 ‘공동주택 명칭이 어렵고 복잡해 방문 시 헷갈린 경험이 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뜻도 모르는 아파트 이름이 새로운 ‘공해’를 일으키는 셈이다.》




서울시는 이에 최근 아파트 작명법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외국어 사용 자제 및 한글 이름 사용 △지역의 옛 지명을 활용하고 법정동·행정동 준수 △리버·퍼스트 등 무분별한 펫네임(pet name·별칭) 자제 △10자 내외 글자 수 준수 △공모처럼 다수가 선호하는 이름으로 제정 노력 등 크게 5가지다. 세 차례의 토론회를 거쳐 만든 이 가이드라인에는 공공·민간 건설사 10여 곳이 동참하기로 했다. 김장수 서울시 주택공급기획관은 “아파트 명칭을 정하는 정비사업 조합에 강제할 수는 없지만 건설사가 자발적으로 협약을 맺은 만큼 자정 작용을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 외래어 사용 2000년대 후반 본격화




아파트 작명에 지방자치단체나 정부가 개입한 것은 1974년 이후 처음이다. 1970년대 초 아파트 이름에 ‘맨션’을 붙이거나 △점보 △렉스 △퀸스 등을 붙이는 곳이 늘어났다. 이에 서울시는 신축 아파트에 외래어 사용을 금지하는 대신 △개나리 △상록수 △청실·홍실 등 꽃·나무 이름이나 순우리말을 쓰게 했다. 이후 단지 이름은 ‘압구정 현대아파트’ 등 지역 이름과 건설사 이름을 연결하는 경우가 일반화됐다.

이 흐름은 1998년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 이후 대형 건설사들이 아파트 사업에 진출하면서 달라졌다. 1999년 ‘롯데캐슬’(롯데건설)을 시작으로 △힐스테이트(현대건설) △푸르지오(대우건설) △래미안(삼성물산) △e편한세상(DL이앤씨) 등 건설사마다 브랜드를 만들었다. 두 건설사가 컨소시엄을 꾸린 경우 ‘마포래미안푸르지오’, ‘힐스테이트e편한세상문정’ 등 브랜드 이름을 이어 붙이기도 했다.

이축복 산업2부 기자

외래어 사용은 200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됐다. 지역, 브랜드명에 펫네임을 조합해 이름을 짓는 게 유행을 탄 것. 펫네임은 아파트 특성을 보여 주는 유용한 마케팅 수단으로 각광받게 됐다. 강 근처에 있으면 ‘리버뷰’, 공원이 가까우면 ‘파크’나 ‘포레(스트)’ 등을 붙여 아파트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개발지구 중 가장 먼저 분양한 단지 이름에는 ‘퍼스트’가, 도심에 위치하면 ‘센트럴’을 쓰기도 했다.

여러 단어를 조합한 펫네임도 많다. 서울 송파구 잠실주공1∼3단지를 각각 재건축한 엘스(2008년), 리센츠(2008년), 트리지움(2007년)이 대표적이다. 엘스(LLL’s)는 생활을 즐기는 ‘Living’, 문화를 사랑하는 ‘Loving’, 시대를 이끄는 ‘Leading’의 앞글자 L을 연결했다. 리센츠(Ricenz)는 강(River)과 중심(Center), 최고(Zenith)의 영문 앞글자를, 트리지움은 숫자 3(Tri-)에 박물관(Museum)과 기둥(Column)을 뜻하는 단어를 합쳤다.

신선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 라틴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도 활용된다. 서울 강동구 고덕주공2단지를 재건축한 ‘고덕 그라시움’은 우아하다는 뜻의 ‘gracious’와 건축물을 의미하는 라틴어 ‘Um’을 더한 조어다. 강남구 일원동 일원현대를 재건축한 ‘래미안개포루체하임’은 빛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루체’와 집을 뜻하는 독일어 ‘하임’을 붙였다. 최근 강남구 압구정 2구역(신현대아파트)의 재건축 설계안에는 6개 동 스카이라운지 이름을 △벨르빌르 △몽소 △튈르히 △프롬나드 플랑테 △앙드레 시트로엥 △플로랄 드 파리 등 프랑스 정원 이름들로 지었다.




● 집값 띄우려고 명칭 변경 소송까지 제기




아파트 이름이 ‘집값 띄우기’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유명한 지명을 넣어 입지가 좋다는 인상을 주려는 경우가 많다. 2014년 입주한 서울 양천구 신월동 ‘신정뉴타운롯데캐슬’은 단지명에 ‘목동’을 넣으려다 양천구청에서 반려당했다. 그런데 2021년 구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냈다. 같은 신월동이면서 목동보다 거리가 더 먼 단지가 2020년 5월 ‘목동센트럴아이파크위브’라고 이름 붙이자 자극을 받았다는 해석이 나왔다. 행정소송에선 결국 패소했지만 단지 입구에는 현재까지도 ‘목동’이 기재된 문주가 있다.

인지도가 높은 지명의 이름을 빌리다 보면 단지 이름과 행정구역이 일치하지 않아 혼선을 빚기도 한다. 경기 고양시 덕양구 덕은동 일대를 개발한 덕은지구에 있는 8개 아파트 모두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디지털미디어시티(DMC)를 넣어 이름을 지었다. 경기 화성시 반월동에 있는 아파트에서 ‘신동탄’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례도 있다. 펫네임이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바다 조망 세대는 극히 일부인데도 ‘오션뷰’를 단지명에 붙이거나, 도심이라고 보기 어려운 입지인데도 ‘센트럴’ 같은 단어를 단지명에 넣곤 한다.

인지도 높은 브랜드를 아파트 이름으로 쓰면 집값 상승 효과가 있다는 분석도 없는 건 아니다. 2021년 한국부동산분석학회에 따르면 아파트 명칭을 인지도가 더 높은 브랜드로 변경(엠코타운→힐스테이트)한 경우 그렇지 않은 주변 아파트보다 약 7.8% 집값 상승 효과가 있었다. 2006년 이후 서울 아파트 중 이름을 바꾼 9개 단지와 인근 단지 실거래 사례 4만2961건을 분석한 결과다.

다만 이는 단기적 효과에 그쳤다고 학회는 분석했다. 또 수색을 DMC로 바꾸는 식으로 지역명을 바꾼 경우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효과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집값을 끌어올리기는커녕 혼란만 낳는다는 지적도 내놓는다.

함영진 직방 빅데이터랩장은 “같은 브랜드인데 외국어 표기가 대문자, 소문자로 다르거나 받침이 ‘ㅂ’인지 ‘ㅍ’인지에 따라 검색 결과가 다를 때가 많다”며 “건축물 대장 등에서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권일 부동산인포 리서치팀장은 “단지 이름이 길어지면 가독성이 떨어져 보는 사람이 장황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며 “간결한 단지 이름이 아파트 홍보에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국내 대형 건설사에서 브랜드 담당 임원을 맡았던 한 관계자는 “재건축 조합에서 펫네임을 붙여 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는데 마케팅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라 펫네임을 자제하도록 설득하는 데 애먹었다”고 말했다.






이축복 산업2부 기자 bles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