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프로 스포츠 지도자들이 ‘짤리면’ 보통 해외 연수를 간다. ‘부족한 걸 채우고 돌아오겠다’고들 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사실상 ‘구경꾼’으로 생활하고 돌아오는 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경질 과정에서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할 시공간이 필요하다”는 게 좀 더 솔직한 이유 아닐까. 말하자면 ‘명장병’ 치유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프로배구에서 가장 심한 명장병 환자는 최태웅 전 현대캐피탈 감독이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찾아보면 그에게 명장병 진단을 처음 내린 기사는 황규인 기자 그러니까 이 ‘광화문에서’를 쓰고 있는 사람이 썼다. 그만큼 그의 명장병을 잘 안다고 자부한다. 지난해 12월 21일 경질당한 뒤 한 달 넘게 칩거하던 그를 최근 만나 명장병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는지 물었다.
워낙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일만 골라 한다는 걸 알기에 해외 연수 이야기는 꺼내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다고 “코딩 공부를 하고 있다”고 답할 줄은 몰랐다. 최 전 감독은 “사실 팀에 있을 때도 틈틈이 코딩 공부를 했다. 시간이 났으니 코딩을 제대로 배워 배구 작전 구상에 제대로 활용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최 전 감독은 이런 공부를 바탕으로 남들과 다른 선택을 내리기 시작했다. 다른 팀은 다 한 명인 수비 전문 포지션 리베로 자리에 굳이 두 명을 쓴다거나, ‘원포인트 서브 전문 선수’를 따로 키워 세트마다 마무리 투수처럼 기용하는 식이었다. 재미있는 건 이런 전술이 이제는 프로배구에서 ‘뉴 노멀’이 됐다는 점이다. 그만큼 이런 전술이 잘 통했다. 최 전 감독은 ‘만년 2위 팀’ 현대캐피탈에 두 차례 우승 트로피를 선물했다.
문제는 남들이 하지 않는 것에만 너무 매달렸던 게 결국 독이 됐다는 거다. 그 바람에 ‘세상에는 이미 잘린 감독과 앞으로 잘릴 감독만 있다’는 프로 스포츠 세계 논리를 비켜 가지 못했다. 지난 시즌 준우승팀 현대캐피탈이 시즌 반환점을 앞두고 ‘뒤에서 2등’을 하고 있다는 건 잘리고도 남을 이유였다. 최 전 감독 체제에서 4승(13패)에 그쳤던 현대캐피탈은 그가 지휘봉을 내려놓은 바로 다음 경기부터 5연승을 내달렸다. 이런 결과와 최 전 감독의 명장병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스포츠를 10년 넘게 취재하면서 느낀 게 있다. 명장병에 걸린 모든 지도자가 명장이 되는 건 아니지만 명장 반열에 오른 지도자에게는 모두 명장병 증상이 있다는 점이다. 그 증상을 잘 다스리면 명장이 되지만 그러지 못하면 그냥 명장병 환자로 남는다. 코딩 공부가 최 전 감독의 명장병을 ‘관리 가능한 질병’으로 바꿔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