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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거테인먼트’에 빠진 미국 [특파원칼럼/문병기]

입력 | 2024-01-28 23:45:00

조롱·혐오로 지지층 결집하는 트럼프
‘트럼프發 미래’ 공포 자극하는 바이든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21일(현지 시간) 미국 뉴햄프셔주(州) 햄프턴에 있는 한 식당.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한 딘 필립스 하원의원(미네소타주)의 연설을 듣기 위해 주민 60여 명이 모여들었다. 재선 도전을 선언한 조 바이든 미 대통령 추대 분위기에 반기를 들어 사실상 ‘왕따’를 당하고 있는 필립스 의원의 유세다 보니 주지사나 유력 정치인들의 찬조 연설도 없었다.

민주당과 공화당 중도 성향 의원들이 결성한 초당적 협치 기구 ‘문제해결위원회(Problem Solvers Caucus)’ 소속인 필립스 의원은 이날 자신의 출마 이유로 ‘분노의 정치’ 극복을 내걸었다. 그는 “미국인의 70% 이상은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대결을 원치 않는다”며 “이들의 앵거테인먼트(Angertainment)가 미국의 분열을 과장하고 미국인들을 좌절시키게 내버려 둬선 안 된다”고 했다.

앵거테인먼트는 이른바 ‘막장’ 소재로 분노를 유발해 시청률을 올리는 TV 프로그램을 일컫는다.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의 ‘비호감 대선’을 막장 프로그램에 비유한 셈이다. 그는 “앵거테인먼트는 민주주의의 위협”이라며 “미국이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투표로 보여 달라”고 했다.

하지만 23일 열린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결과는 그의 기대와 달랐다.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민주당과 공화당 경선에서 압도적인 득표로 재대결을 사실상 확정했다.

공화당도 2년 넘게 ‘트럼프 대안’을 찾기 위한 논의가 활발했다. 전통적 공화당 주류파를 대변하는 반(反)트럼프 정치인들부터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 성향의 젊은 정치인들까지 수많은 이들이 도전장을 던졌다. 하지만 끝내 공화당 지지층의 선택은 트럼프였다.

2021년 ‘1·6 의사당 난입사태’를 촉발해 미국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지탄을 한 몸에 받고 추락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부활시킨 것은 그의 강력한 팬덤이다. 아이오와와 뉴햄프셔에서 이어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유세는 록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체감온도 영하 30∼40도에 이르는 살인적인 날씨에도 꼭두새벽부터 행사장 앞에 진을 치고 ‘오픈런’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다른 정치인의 유세에선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다. 수십 달러에 이르는 ‘마가(MAGA·미국을 위대하게)’ 모자나 목도리 등으로 치장한 지지자들이 1시간 반 이상 이어지는 연설에 시종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유세는 이들에게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종교적 체험에 가까운 듯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지지층의 강력한 결속의 중심엔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연설에는 시종일관 바이든 전 대통령과 경쟁 후보들에 대한 도를 넘는 조롱과 불법 이민자나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 발언 등 수위를 넘나드는 표현이 넘쳐난다. 하지만 표현이 거칠어질수록 지지자들의 환호성은 더욱 커진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가 끝나기 무섭게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로 확정됐다”며 공화당보다 앞서 트럼프 대세론을 공인한 민주당은 “극우가 공화당을 장악한 것”이라며 바이든 재선 필연론을 띄우고 있다. 경제 성적도, 외교 성과도 호응을 얻지 못한 바이든 대통령 역시 최근 대선 연설의 대부분을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공포로 채우며 민주당 지지층의 분노를 자극하고 있다.

이제 기정사실화된 바이든 대 트럼프의 ‘리벤지 매치’는 11월 대선까지 난투극에 가까운 치열한 공방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미 대선 역사상 가장 긴 대선 본선 레이스인 만큼 상대에 대한 지지자들의 분노 수위와 피로감도 이전엔 경험해 보지 못한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상대를 악마화하고 지지층의 분노를 자극하기 위한 경쟁에 몰두하는 앵거테인먼트의 결말이 벌써부터 두려워진다.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