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반세기가 흐른 1995년, 일본 곳곳에서 ‘침략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도쿄에서 서북쪽으로 100km쯤 떨어진 군마(群馬)현에서도 조선인 6000여 명이 강제징용으로 끌려왔고, 이 중 상당수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숨진 사실이 밝혀졌다. 이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지역 시민단체와 기업,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추도비 건립에 나섰다. 재일동포들도 총련, 민단 가릴 것 없이 힘을 보탰다.
▷그렇게 2004년 세워진 것이 다카사키시 ‘군마의 숲’ 공원에 있는 ‘군마현 조선인·한국인 강제연행 희생자 추도비’다. 비석 앞면엔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라는 글이 일본어와 한글, 영어 순으로 크게 쓰여 있다. 뒷면에는 한국인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입힌 역사를 반성해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긴 글이 일본어와 한글로 적혔다. 일본의 반성을 담은 추도비가 지자체 소유 공원에 들어선 건 군마현이 유일한데, 당시 현은 정치적 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설립을 허가했다.
▷그런데 20년간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있던 이 추도비가 29일부터 철거에 들어간다. 군마현은 2주 동안 공원 전체를 폐쇄하고 추도비를 철거한다고 한다. “강제동원 역사를 부정하는 만행”이라며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철거를 지지하는 우익단체의 충돌을 고려한 조치다. 시민단체가 추도비 앞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는 것을 트집 잡아 극우 세력들이 철거를 주장한 건 아베 신조 정권이 출범한 2012년 무렵이다. 이때부터 일본 각지의 한국인 위령비, 추모비가 우익 세력의 표적이 됐다.
▷일본 전역에 150개가 넘는 조선인 추모비가 있는데, 지방정부가 직접 철거에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집권 내내 역사수정주의적 관점으로 과거사를 미화하려고 했던 아베 정권의 ‘침략의 역사 지우기’가 군마현에서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한일 정상의 수차례 만남으로 파행을 거듭하던 양국 관계가 정상화 궤도에 복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해의 기억을 지워 가는 일본의 변화 없는 태도가 계속되고 있어 씁쓸하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