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수 공화국’의 그늘]〈상〉 정시 원서도 안내고 재수학원에 “불수능에 수시 최저학력 못채워” “의대-무전공 늘린다니 수능 재도전” 올 N수생-검정고시 비율 34% 전망
1월부터 재수학원은 만석 이달 17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재수학원 자습실에서 수험생들이 내년도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 올해 의대 증원과 무전공 선발 확대 등이 예고되면서 수험생 상당수가 정시모집 원서 접수를 포기한 채 연초부터 재수학원에 몰리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17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재수종합학원.
점심 식사를 마친 학생 10여 명이 학원 내 작은 정원에서 눈을 구경하고 있었다. 오전 7시 50분부터 오후 10시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이 유일하게 햇볕을 쬘 수 있는 시간이다. 이들은 고등학교 졸업식도 마치지 않은 채 이달 2일 재수종합학원에 입소했다.
학원 한쪽에는 ‘내년에도 또 이러고 있다고 생각해 봐라’ ‘엄마 보고 싶어요’ 등 학생들이 바람과 각오를 적은 종이가 가득 붙어 있었다. 복도에는 ‘복도 내 대화 금지. 적발 시 벌점’ ‘전자기기 사용 위반 경고’ 등의 문구가 보였다. 이 학원 관계자는 “대입 정시모집에서 원서를 아예 쓰지 않고 일찌감치 재수를 결심하고 온 학생들”이라며 “제주, 대전 등에서 올라온 학생도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도 연초부터 “내년도 입시에서 N수생 비율이 역대급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연초 추세 등을 감안할 때 올해 수능 지원자 중 N수생과 검정고시 출신을 합친 규모가 17만5000명 이상으로 예상된다”며 “비율로는 34%가량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학령인구가 감소하는데 N수생이 늘어나는 현상이 이어지는 걸 두고 ‘N수 공화국’이란 말도 나온다.
N수생이 늘어난 이유가 지난해는 ‘킬러 문항 없는 물수능’에 대한 기대감이었다면 올해는 반대로 불수능과 ‘의대 정원 확대’ ‘무전공(전공자율선택제) 선발 확대’ 등의 정책 때문이다.
먼저 지난해 수능이 어려워 수시모집에서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충족하지 못했거나 수능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수험생이 대거 ‘N수’에 도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치동의 한 입시학원 관계자는 “이르면 다음 달 의대 증원 규모가 발표되고 4월에 무전공 선발 규모가 나오면 의대 등 인기학과에 진학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로 대학 재학생 상당수도 반수에 뛰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시 발표 안났는데… “인서울 공대 갈 상위권도 반수 생각”
‘정시 지원도 않고 재수’ 고3 늘어
“지방대 권유하면 부모 반응 냉담”
올해 의대 증원-무전공 선발 기대감
학원들은 반수반 3월 조기 개설
입시 전문가들은 현재 ‘N수 시장’이 폭풍 전야라고 입을 모은다. 다음 달에 정부가 의대 증원 규모를 발표하고 올 4월 대학들이 무전공 선발 규모를 밝히면 N수생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다. 고교 졸업생 상당수는 이미 “입시 경쟁이 치열할 것”이라며 정시 원서 접수를 포기하고 학원에 들어갔다. 수시에 합격했거나 정시에 지원한 학생 중 상당수도 반수를 염두에 두고 있다. “지방대 권유하면 부모 반응 냉담”
올해 의대 증원-무전공 선발 기대감
학원들은 반수반 3월 조기 개설
● 대입 원서 안 쓰고 재수학원행
대전의 한 고교에 다니는 정영훈(가명·19) 군도 그런 경우다. 학교에 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새해 첫날 서울 강남구 대치동 재수학원 인근에 짐을 풀었다. 그는 “수시에 올인했는데 불수능이었던 탓에 수능 최저학력기준에 미달돼 실패했다”며 “부모님께서 ‘지원해줄 테니 정시 원서 넣지 말고 다시 도전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정 군이 학원과 학사에 쓰는 돈은 한 달에 450만 원가량이다. 학사는 지방 출신 수험생이 서울 재수학원에서 공부할 때 머무는 고급형 고시원이다. 고시원보다 쾌적하고 청소, 빨래와 아침 식사 및 주말 저녁 식사를 차려주는 대신 월 150만 원이 기본이다. 관리실장이 모닝콜을 해주고, 출입 기록을 학부모에게 알려주며 재수학원까지 셔틀을 운영하는 학사는 200만 원가량이나 한다.
고교 교사들은 올해 정 군처럼 정시 원서를 아예 안 쓰고 대입에 재도전하는 이른바 ‘생재수’가 늘었다고 입을 모았다. 대전의 한 고교 교사는 “원서를 아예 안 쓰고 도전하겠다는 비율이 예년보다 20∼30%가량 늘었다”고 했다. 서울의 한 고교 교사도 “서울 일반고의 경우 반마다 보통 2, 3명이 아예 원서를 안 쓰는 생재수를 택하는데 올해는 4, 5명 정도로 늘었다”고 전했다.
● “반수 늘어 3월부터 전용반 운영”
올 2월 고교를 졸업하는 학생은 39만4940명으로 지난해(43만1118명)보다 3만6000여 명이나 적다. 그럼에도 N수생 수가 지난해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는 건 의대 정원 확대, 무전공 신입생 선발 등 N수를 자극할 요인이 많아서다. 저출산으로 아이를 1, 2명만 키우는 부모가 늘며 ‘인 서울’ 대학을 보내기 위해 지출을 아끼지 않는 영향도 있다.
일부 재수학원들은 다음 달 의대 증원 발표 때부터 반수생이 쏟아질 것으로 보고 3월부터 야간반과 주말반을 개설할 방침이다. 한 입시학원 관계자는 “원래 반수반은 대학 1학기가 끝나는 6월부터 운영했다. 하지만 올해는 학기 초부터 의대 준비에 올인하려는 학생이 많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학부모와 수험생 사이에서 수도권 대학을 고집하는 분위기도 N수생 증가 요인이 되고 있다. 경기 지역의 한 고교 교사는 “지방대에 정시 원서를 낸 한 학생은 한 반에 없거나 1, 2명 수준”이라며 “지방 국립대를 권유하면 학부모로부터 냉담한 반응이 돌아온다”고 했다. 광주의 한 고교 교사는 “가정에 아이가 한둘밖에 없다 보니 ‘아이가 재수할 수 있게 선생님이 설득해 달라’고 하는 등 재수에 적극적인 학부모가 늘었다”고 했다.
N수 열풍이 이어지는 것을 두고 전문가 사이에선 우려가 쏟아진다. 서울의 한 고교 교사는 “반수생 때문에 정말 그 대학에 가길 원했던 학생이 떨어지고 N수를 하기도 한다. N수생이 가져오는 파급효과와 국가적 낭비가 엄청나다”고 했다.
정제영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N수 열풍은 결국 원하는 대학이나 학과에 가지 못하기 때문인 만큼 의대 증원과 무전공 선발 확대가 정착되면 중장기적으로 과당 경쟁 방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또 지방대를 나와도 취업이 잘 되고 일정 수준 이상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와 대학, 기업들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
이문수 기자 doorwat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