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3개월 만에 다시 가본 현장 인파 밀집 모니터링 등 일부 변화… 근본 원인 성찰없는 땜질처방 우려 수사는 개인 불법행위 입증에 초점… 참사 야기한 원천 구조는 못 밝혀 외국인 유족들 정부 무책임에 충격… 선진적 사후대처 프로토콜 만들어야
26일 저녁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해밀톤호텔 옆 골목을 한 군인이 걷고 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핼러윈 참사가 이 골목에서 벌어졌다. 당시 폭이 3.2m에 불과한 좁은 비탈길에 수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압사 사고가 발생해 159명이 희생됐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금요일인 26일 저녁 서울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은 한산했다. “여기가 맞아?” “이렇게 좁았다고?” 골목 앞에서 두리번거리던 두 여성은 바닥에 ‘10·29 기억과 안전의 길’이라고 쓰인 동판을 발견하고는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군복 차림으로 혼자 온 20대 남성은 골목 한가운데를 몇 분간 서성였다. 사건이 나던 날 입대를 며칠 앞두고 송별회를 하러 이 골목을 지나갔다고 했다.
그는 골목의 경사 구간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성인 4명이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인 폭 3.2m에 길이 10m 남짓한 공간(10평)이었다. 그날 밤 이 10평 안에서만 300여 명이 겹겹이 짓눌렸다. 사망자 159명 중 대부분이 거기서 숨을 거뒀다. 시신들이 수습된 뒤 골목에는 주인 잃은 휴대전화 수십 대가 밤새 울렸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이후 1년 3개월이 흘렀다. 우리는 얼마나 더 안전해졌을까. 그 많은 죽음을 왜 막지 못했는지 이제는 답을 발견한 것일까.》
●현장 달라졌지만 땜질처방 우려
주말인 28일 오후 7시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U강남도시관제센터를 찾았다. 강남역 등 관내 인파 밀집지역을 비추는 폐쇄회로(CC)TV 화면이 10여 개 띄워져 있었다. 인파가 많이 모이는 120곳의 실시간 상황을 볼 수 있고 3.3㎡(1평)당 1명 이상이 감지되면 ‘주의’ 알람이 울리도록 설정돼 있다. 행정안전부가 이달부터 일부 지자체에 도입한 인파관리 시스템이다. 서울시도 이동통신 3사로부터 기지국 접속 정보를 제공받아 휴대전화 사용자 수를 추정해 인파 밀집 정도를 파악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민상현 강남구 도시관제팀장은 “운영한 지 한 달쯤 됐는데 ‘주의’ 표시가 뜨는 상황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고 했다.
경찰 112상황실에도 인파 밀집 신고에 적극 대응하라는 지침이 내려진 상태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요즘은 사람이 몰린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바로 출동해 요란할 정도로 조치한다. 적어도 이태원 같은 압사 사건이 재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건 당시 핼러윈처럼 주최자가 없는 행사의 경우 안전관리 주체가 모호하다는 지적이 일었는데 이를 반영해 지자체장이 책임지도록 하는 재난안전관리법이 지난해 12월 8일 국회를 통과하기도 했다.
이태원 사건 이후 현장에서는 조금씩 변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의 이 같은 대책들이 이태원 사건의 종합적인 원인 진단을 거쳐 도출한 방안인지에 대해선 아직 의문이 많다. 사건 발생 후 국회 국정조사가 진행됐고, 경찰 특별수사본부와 검찰 수사가 완료됐지만 참사 현장에서 제기된 핵심적 질문들에 대한 답은 명쾌히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사 목적 실체 규명의 한계
윤석열 대통령은 30일 이태원 사건의 진상을 밝힐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는 내용의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검경 수사가 끝난 상황에서 추가 조사의 필요성이 없고 불필요한 정쟁을 야기할 것이란 이유에서였다. 이미 수사가 이뤄졌으니 그것으로 실체 규명이 충분히 됐다는 취지다.
하지만 대형 참사 처리에 있어 수사 중심의 접근은 한계가 뚜렷하다. 수사는 수사 대상이 될 만한 일부 개인의 행위가 형법에 위반되는지를 확인할 뿐 사건을 야기한 원천적 환경과 구조 등을 총체적으로 규명하진 않기 때문이다. 수사를 통한 사건의 재구성은 불법행위를 입증할 증거를 중심으로 관련 법리에 부합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제한적이고 파편적일 수밖에 없다. ‘재발 방지’라는 일관된 관점을 유지하면서 참사의 시작과 끝을 촘촘히 밝히려면 정부나 정치권의 입김에서 독립된 전문가 중심의 진상조사가 필요하다.
●참사 후 진상조사 제도화한 선진국들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9명 중 외국인 희생자는 26명에 달한다. 미국 영화사 파라마운트가 최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공개한 다큐멘터리 ‘크러시(Crush)’에는 외국인 희생자 유족들의 목소리가 생생히 담겨 있다. 이들은 한국 정부의 무책임한 사후 대응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같은 선진국에서 이런 대참사가 벌어졌는데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도 이뤄지지 않고 유족들에게 정확한 사건 경위를 설명하지 않는 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대형 참사가 벌어지면 형사 처벌을 위한 수사와 별개로 전문가가 중심이 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린다. 1989년 축구장에서 관람객 97명이 압사한 힐즈버러 사건을 겪은 영국은 대규모 인명사고 후에는 공적 조사위원회가 자동 구성되도록 제도화했다. 힐즈버러 사건 생존자이자 재난관리 전문가인 앤 에어 박사는 “진상조사는 공개 조사와 사인 규명, 범죄 수사 등 세 가지 축의 절차가 상호 보완하며 이뤄져야 사건 전체를 규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호주도 대형 재난이 발생하면 진상 규명을 위한 왕립위원회가 곧바로 구성된다. 2009년 산불이 빅토리아 지역 600곳으로 번져 173명이 사망한 사건이 나자 2주 만에 조사위원회가 꾸려졌고 이후 1년 5개월에 걸쳐 조사가 이뤄졌다. 진상조사를 할지 말지를 두고 소모적 논란을 벌이기보다 지체 없이 조사에 착수해 충분한 기간 동안 다각도로 살핀다.
이태원 사건의 유사 사례로 거론되는 2001년 일본 효고현 아카시시 ‘불꽃축제’ 압사 사고 때도 관할 지자체는 위기관리, 방재, 구급의학 등 각 분야 민간 전문가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설치해 7개월간 조사를 벌였다. 조사는 사전 준비가 왜 부족했고, 위험이 예상되는데도 경찰과 지자체 간 협의가 왜 이뤄지지 않았는지 등에 집중됐다.
재발을 막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안은 진상조사를 통해 사건의 구조적 원인이 특정될 때 도출할 수 있다. 효고현 경찰이 만든 인파 경비 매뉴얼에는 “초등학생도 알 수 있게 쉬운 말을 쓰고, 문장을 45자 전후로 짧게 쓰며, 복문을 쓰지 말고 영어처럼 결론부터 말하라”는 등의 현장 밀착형 대응 요령이 담겼다. 일본항공(JAL) 여객기가 2일 하네다 공항 활주로에서 다른 항공기와 충돌했을 때 승무원들의 기민한 대처로 전원 생존한 것도 40년 전 대형 추락사건 이후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피로 쓴 매뉴얼’을 만들고 훈련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긴급구조 시스템, 미국의 국가테러방지센터 등도 각각 힐즈버러 사건, 9·11테러 같은 대형 참사 후 구성된 진상조사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국가 대응 체계를 개선한 사례들이다.
●사후 대응 선진 프로토콜 만들어야
이태원 참사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게 대형 인명사고에 공정하고 전문적으로 대처하는 선진적인 프로토콜을 만드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세월호 사건 이후 1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진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해외에서도 진상조사위원회 구성과 권한을 두고는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특별법이 국회로 되돌아오면 여야가 조사위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높이는 쪽으로 추가 협상을 해서라도 이태원 참사의 실체를 밝힐 기회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