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를 영화로 읊다]〈74〉 고요한 밤의 향수
영화 ‘춘몽’에서 예리(가운데)는 자신이 운영하는 술집 고향주막에서 이백의 ‘고요한 밤의 향수’를 외운다. 률필름 제공
장률 감독의 영화에선 익숙한 한시가 색다른 울림을 빚어낸다. ‘춘몽’(2016년)에서 고향 연변을 떠나 아빠를 찾아 한국에 온 예리는 식물인간이 된 아빠 병 수발에 차츰 지쳐간다. 예리는 달 밝은 밤 고향주막에서 당나라 이백의 시를 읊는다.
영화에서 예리가 운영하는 고향주막의 단골은 각각의 사연을 가지고 떠도는 세 남자다. 탈북자 정범, 고아 익준,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종빈. 이 삼총사는 예리에게 기대 각자의 결핍을 채운다. 예리가 이 시를 읊고 설명해주자 익준은 시가 너무 간단해서 자신도 쓸 수 있겠다고 말한다.
장률 감독은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 ‘당시’(2003년)에서도 이 시를 인용했다. ‘춘몽’에서 예리와 삼총사가 함께 본 영화가 바로 이 작품이다. 감독은 당시를 좋아하고 엄격한 예술적 틀 속에서도 자유를 추구한 이백을 특히 더 좋아한다고 밝힌 바 있다(정성일과의 대담). ‘당시’에서 ‘고요한 밤의 향수’가 낭송될 때 지난 삶을 후회하는 전직 소매치기는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말없이 응시한다.
‘춘몽’에서 예리는 정범에게 북한이 싫어서 왔는데 이제 이곳을 더 싫어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정범은 북한에 두고 온 병든 여동생을 잊지 못하지만, 북도 남도 그에겐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예리 역시 고향 연변을 그리워하지만 차마 아빠를 버리고 돌아갈 순 없다. 북한이나 연변에 가보고 싶다는 종빈에게 익준은 여기가 고향이라고 타박을 준다. 영화 속 인물들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고단한 삶 속에서 각자의 그리움으로 떠돈다. 이백의 ‘고요한 밤의 향수’가 일장춘몽 같은 인생 속에서 새롭게 발화(發話)한다.
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