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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지하 1000m로 내려간 물리학자들[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입력 | 2024-02-01 23:21:00

이기진 교수 그림


가끔 선후배 모임에 가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걸 이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대화 중에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이런 말들을 불쑥불쑥 꺼낸다.

나는 구석에서 주로 듣는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별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모임이 끝나고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내세울 게 없는 물리학자인 게 참 다행이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새벽에 학교에 가서 수업을 하고 연구실 책상에서 논문을 쓰다가 실험실에서 연구원들과 연구하는 일이 생활의 전부인 물리학자. 연구원들과 주로 하는 반복적인 대화는 이런 것들이다. “왜 안 되지?”, “그래, 한 번 더 해보자”. 하루가 끝날 땐 “내일 다시 생각해 보자”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결론이 없는 하루하루. 불확실한 것투성이의 하루하루.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알고 설명할 수 있는 세상은 4%밖에 안 된다. 인류는 우주를 이루는 물질의 4%만을 설명할 수 있고, 나머지는 아직 모른다. 모르는 96%는 암흑물질이 23%, 암흑에너지가 73%를 차지한다. 우리는 고작 4%에 의지해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암흑물질을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여성 과학자 베라 루빈이었다. 1975년 루빈이 암흑물질의 존재를 미국천문학협회에서 발표했을 때, 세상은 그녀의 이론을 철저히 무시했다. 루빈 박사는 그 충격으로 인해 몇 년 동안 우주론을 접어두고, 집안 살림에 매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컴퓨터 모형 덕분에 루빈이 옳았음이 입증되었고, 1980년대에 들어 다시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암흑물질 후보로 꼽히는 대표적인 입자 중 하나가 중성미자다. 중성미자는 탐지하기 어려운 입자로, 모든 사물을 통과할 정도로 작고, 다른 입자들과 상호작용 없이 모든 것을 투명하게 통과한다. 이 탐지하기 어려운 입자들은 우주 공간 속에 존재하면서 우리 몸을 통과하고 나서도 별 어려움 없이 땅속을 뚫고 들어가서 지구 반대편으로 나온 뒤 이동을 계속한다. 이런 특성을 가진 중성미자를 탐지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중성미자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지상의 우주선(宇宙線)이 차단되는 깊숙한 지하가 필요하다. 최근 중국에서는 지하 2400m 깊이에 크기 33만 m³에 달하는 진핑 지하실험실이 만들어져 가동이 시작되었다. 지상에 비해 1억분의 1 정도 극소량의 우주선만이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크기는 작지만 우리나라에도 지하 실험시설이 있다. 강원 정선군 예미산에 위치한 지하 1000m 깊이의 ‘예미랩’이 그곳이다. 예미랩은 7년여의 공사 끝에 지난해 완공됐는데, 현재 한국의 물리학자들이 이 깊숙한 땅속에서 암흑물질의 후보가 될 만한 입자를 찾는 중이다. 예미랩이 완성되기 전에는 강원 양양 양수 발전소 내 지하 700m에 위치한 터널 한쪽에서 연구가 진행됐었다.

과연 우리 인류는 암흑물질을 발견할 수 있을까? 기존의 지식에 머무르지 않고 미지의 세계로 겁 없이 뛰어드는 것, 나는 무엇보다도 이런 물리학자의 자세가 좋다. 어쨌거나 상상의 세계, 잘 모르는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마음은 언제나 옳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