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시대부터 에도 시대 말기까지 천황이 머물렀던 천황궁 교토 고쇼. 사진 출처 ‘리브 저팬’ 홈페이지
천황, 막부의 조약 칙허 요구 거절
막부의 대미 통상조약 칙허 요구를 거부한 고메이 천황(재위 1846∼1867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
그간 일본사에서는 ‘막부의 통상조약 칙허 요구를 고메이 천황이 거절해서 막부는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는 식으로만 서술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의아한 일이다. 250여 년간 막부에 찍소리도 못 하던 천황이 어떻게 이렇게 중차대한 시점에 반기를 드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간 교토의 조정 내에서는 어떤 일들이 전개되어 온 것일까.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수면으로 올라온 것이 1858년 초의 사태가 아니었을까.
역사서 학습, 군주의식 배양
다행히 최근의 연구들로 이런 의문들이 많이 해소되었다. 짐작대로 조정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드라마처럼 생긴 일은 아니었다. 멀리는 18세기 말부터 늦어도 19세기에 들어서 천황과 조정은 자신이 일본의 치자(治者)라는 ‘군주 의식’에 눈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김형진, ‘도쿠가와 후기 조정의 부상과 학문의 역할’·‘막말 조정의 학습원과 공가사회의 정치화’). 1780년부터 재위하던 고카쿠(光格) 천황은 ‘효경’ 같은 기초교육을 넘어 ‘십팔사략’ ‘정관정요’ 같은 역사나 통치 이념과 관련된 사서를 학습했다. 이것들은 자칫 천황의 정치적 각성을 초래할 수도 있는 책들이었다. 비슷한 시기 고사쿠라마치상황(後櫻町上皇)도 ‘논어’ ‘맹자’ ‘상서(尙書)’ ‘예기’ 같은 경서와 ‘정관정요’ 같은 제왕학, ‘좌전’ 같은 사서를 공부하는 학습회를 수십 년간 계속했는데, 여기에는 20여 명의 공가(公家·조정 신하)도 참여했다. 이 무렵 봄·가을에 농민이 상황의 궁궐(仙洞御所)에 들어와 모내기와 수확하는 시범을 보이고, 이것을 천황이 관람하는 의식이 연중행사로 정착되었다. 이는 동아시아 군주들의 친경(親耕·왕이 농업 장려에 솔선하는 뜻으로 적전에 나가 몸소 갈고 씨 뿌리는 의식)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천황의 ‘군주 의식’ 배양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형진은 닌코(仁孝) 천황(재위 1817∼1846년) 때가 되면 역사서 강독은 정례화되었고, 운영 방식, 커리큘럼도 체계화되어 가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까지는 거의 중국 사서를 읽는 한어회(漢御會)만 있었던 데 비해, 1830년대 중반에는 일본 사서를 강독하는 화어회(和御會)도 곧잘 개최되었다. 여기서는 ‘일본서기’ ‘속일본기’ ‘일본 후기’ 등 일본 정사인 육국사(六國史) 학습이 이뤄졌다. 치자 의식과 함께 자국의 역사에 대한 인식도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닌코 천황기의 학습회에는 더 많은 공경들이 참석했고, 때로는 황족도 들어왔다. 이런 분위기는 마침내 공가를 위한 교육기관 설립 움직임을 불러일으켜 1847년 학습원의 창설이 실현되었다. 이를 통해 천황과 자리를 함께할 수 있는 상급 공경뿐 아니라 다수의 하급 공가들도 경서, 사서 학습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학적(學的) 네트워크’가 형성되게 되었다.
천황-신하, 토론 통해 정치적 각성
19세기 에도의 학습원에서 회독 학습법으로 공부 중인 사무라이들을 그린 당시 삽화의 일부. 참가자들이 글을 읽고 각자의 해석을 나누는 회독 학습법은 자연스레 정치 토론과 비평으로 이어졌고 천황과 조정 신하들의 정치적 각성에 기여했다. 사진 출처 마에다 쓰토무 ‘에도의 독서회’ 일본판 표지
막부와 사무라이들이 천황과 공가들을 ‘긴소매(長袖) 입은, 유약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업신여기며 자만에 들떠 있는 사이, 교토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변하고 있었다. 막부가 통상조약 칙허를 얻기 위해 홋타 마사요시를 파견했던 1858년 고메이 천황은 재위 12년째를 맞는 37세 청년 군주였다. 이상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고 학습해 온 이 젊은 천황과 공가들이 개항이라는 국가의 대위기를 맞아 독자적인 정치 행보를 보인 것은, 이렇게 보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눈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오래 쌓여온 변화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순간, 세상이 경악하는 일은 역사에서 드물지 않다. 평소 눈여겨 살펴볼 일이다.
박훈 서울대 역사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