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끼고 사는 사람들의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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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분한 것은 싫지만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깝다. 쓸모없는 물건이라도 버리기로 결심할 때마다 찝찝하고, 죄책감마저 든다면 ‘절대 낭비하면 안 된다’는 강박적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자. 게티이미지뱅크
60대 주부 김정선 씨(가명)는 최근 20년 넘은 김치냉장고를 두고 딸과 다퉜다. 새로 산 김치냉장고가 배달되던 날, 김 씨가 기존 냉장고를 버리지 않고 베란다에 두겠다고 고집한 게 빌미가 됐다. 딸을 비롯한 가족들은 소음이 심하고 전기 효율도 떨어지는 낡은 냉장고는 당장 버리자고 했다. 하지만 김 씨는 “아깝게 왜 버리느냐”고 버럭한 뒤 베란다 한켠에 자리를 마련했다. 그곳에는 이미 낡은 믹서기부터 선풍기, 청소기, 러닝머신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집안 곳곳에는 김 씨가 모아 둔 책, 신문, 장식품, 종이가방 같은 잡동사니로 가득하다.
김 씨처럼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까워서” “멀쩡한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요즘처럼 물질이 풍요로운 시대라도 함부로 버리기 아까운 물건이 있기 마련이다. 오래 사용해 추억이 깃든 것이라면 더욱 쉽지 않다.
“100% 확신 없인 안 버려” 완벽주의 발동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향의 사람들은 낡은 물건도 어딘가엔 쓸모가 있을 것 같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잡동사니를 끼고 사는 사람들을 30년 이상 연구해 온 랜디 프로스트 미국 스미스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를 ‘저장 강박’으로 설명한다. 저장 강박이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과도하게 쌓아두는 행동을 말한다. 물론 아까워서 못 버리는 사람들이 전부 저장 강박증에 걸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을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을 연구 내용이 많다.
관련 연구 결과들에 따르면 이들은 ‘절대 낭비하지 않겠다’ ‘절대 손해 보지 않겠다’는 완벽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완벽주의 성향의 사람들은 언제나 100%를 지향한다. 당장은 쓸모가 없더라도 100% 쓸모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물건을 버리지 않는다. 이를 거스르고 멀쩡한 물건을 버렸을 때 낭비했다는 생각에 빠지고, 죄책감과 찝찝함을 느낀다.
●죽어도 못 버리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 물건을 버리는 것은 내 일부를 버리는 것이다.
·공짜로 나눠주는 물건을 가져오지 않으면 매우 안타깝다.
·물건을 버리는 것은 물건을 가혹하게 대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내가 보관하는 물건은 중요한 것이다.
·나는 버리는 것이 완벽하게 옳다고 느낄 때만 물건을 버릴 것이다.
‘저장 신념 질문지’ 발췌이들은 ‘언젠간 꼭 쓸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품고, 아주 작은 쓰임새라도 있을 것 같다고 판단되는 물건은 일단 보관한다. 이렇게 아껴뒀던 물건 중에 한 번이라도 요긴한 사용처를 찾는 경험을 하면 “역시 내 말이 맞았어”라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저장 행동을 강화한다.
여기에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는 완벽주의적 성향과 불안감이 더해지면 버려도 된다는 확신을 갖기에 더욱 어려워진다. 물건을 실수로 버리는 일도 낭비에 해당하며, 이 역시 죄책감을 일으킨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물건이 쌓이는 속도가 버리는 속도를 앞지를 수밖에 없다.
“언젠가 꼭 필요”…공짜-할인에 집착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만약을 대비하며 물건을 끼고 사는 사람들은 공짜나 할인에 솔깃해 사 모으는 습관이 있다. 영화 ‘쿠폰의 여왕’의 한 장면. 영화 스틸컷
담아갈 가방이 있으면서도 상점에서 주는 공짜 종이가방을 반드시 챙겨온다. 온라인몰에서 상품을 주문할 땐 항상 선물 포장 요청 메시지를 남겨 포장지를 챙긴다. 가끔은 “아직 멀쩡한 걸 누가 버렸다”며 남이 버린 물건을 주워 오는 경우도 있다.
물건을 아낀다는 이유로 집안의 쾌적함을 포기해야 한다면, 정작 공간을 낭비하고 있는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추억이 사라질까 두려워” 과도한 의미부여
잡동사니를 버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해당 물건을 버리면 그에 얽힌 추억과 경험도 영영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심리학에서는 ‘나(자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로 결정되는 ‘물질적 자아(material self)’가 있다고 본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 ‘나’라는 존재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얘기다.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만약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고 반문했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나에게 의미 있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행위 역시 의미를 갖는다.
수년 전 해외여행에서 쓴 지하철과 기차 탑승권, 현지 음식점 명함, 미술관 입장권 등을 버리면 영영 추억도 같이 사라지게 될 것 같은 걱정에 잡동사니를 정리하기 어려워하는 경우도 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예를 들어 해외여행에서 사용했던 지하철 탑승권이나 영수증 등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기념품처럼 모은다. 소유한 것이 나의 존재를 설명한다고 생각하기에 가지고 있는 하찮은 물건에도 나의 추억 또는 나의 일부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런 ‘소중한’ 물건들을 잘 보관하기보다는 집구석 어딘가에 방치해두기 일쑤라는 것이다.
다시 들춰보지도 않는 각종 문서와 책들을 쌓아두고 버리지 못한다면, 이 역시도 그 안에 들어 있는 정보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우려해서다. 게티이미지뱅크
최근에는 디지털 분야에서 저장 강박 증세를 다루는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 수년 치에 달하는 이메일을 삭제하지 않거나, 어느 폴더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각종 파일을 외장하드에 통째로 저장하는 이들이 연구 대상이다. 이들도 마찬가지다. 데이터를 함부로 삭제했다가 관련 정보를 영영 잃어버리거나, 언제 필요할지 모르는 정보를 없애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사로잡혀 산다.
공허한 마음 달래…의인화하기도
잡동사니에 묻혀 사는 사람은 마음이 공허하고 외로운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쇼핑 중독에 빠져 계속 물건을 사들이는 상황과도 유사하다. 텅 빈 마음을 물건들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한 심리학 실험에 따르면, 슬프고 우울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자신을 위해 물건을 더 많이 사들이는 결정을 내렸다. (이전 기사 ‘‘탕진잼’ 하셨다고요? 사실은 우울한 겁니다‘ 참고) 마음이 허한 사람들이 잡동사니와 함께 사는 것도 비슷한 원리다. 지난해 호주 뉴사우스웨일즈대 심리학과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일수록 외로움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성인 108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물건을 못 버리는 성향이 있는 이들 가운데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77.7%에 달했다. 반면 물건을 버리는 데 문제없는 이들 중에서는 36.8%에 불과했다.
연구팀은 이에 대해 사회적으로 고립돼 외로움을 많이 느낄수록 사람 대신 물건에 애착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건이 외로움에 대한 일종의 보상인 셈이다. 연구팀은 “외로움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습관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2001년 개봉한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무인도에 조난된 주인공은 배구공에 눈코입을 그려 넣고 마치 사람처럼 대한다. 영화 화면 캡처
버리는 물건에 안쓰러움을 느낀 적이 있다면 물건을 의인화한 것이다. “오래 썼는데, 버리려니 미안하네” “이 아이가 쓰레기 폐기장으로 가는 긴 여행을 하다 결국 파쇄되겠지…”라며 감정이입을 한다. 그래서 특별히 소중한 물건이 아니어도 불쌍한 마음에 버리기 어려워한다.
노인층에 3배 많아…“하나 사면, 하나 버려야”
국내 연구사례는 아직 없지만, 해외에서는 물건을 못 버리는 성향의 노인층이 젊은 층보다 약 3배 많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특히 혼자 사는 경우에 두드러진다. 사회생활 빈도가 줄어들고, 교류하는 대인 관계 폭이 좁아지면서 이런 성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2017년 국제학술지 ‘노인정신의학’에 소개된 연구에 따르면 잡동사니를 쌓아두고 사는 성향은 40세 전부터 조금씩 조짐을 보이다가 55세 이후 급격히 증가한다. 은퇴 등으로 사회적 관계에서 점차 고립되는 것과 관련 있다. 이 중에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노인의 저장 강박과 관련한 연구 13개를 종합 분석한 결과다.
대부분은 용인할 수 있는 수준에서 그친다. 하지만 저장 강박 수준이 심각한 경우라면 쉬이 넘길 일이 아니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DSM-5)에선 2013년부터 강박장애의 일종인 ‘저장장애’로 분류할 정도다. 집을 온통 쓰레기로 채우고 사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평생 유병률은 2~ 6%다. 이런 수준이면 사실 치료가 쉽지 않다. 증상은 같지만, 각자의 발병 원인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치료자가 짐을 하나씩 같이 처분하는 수준으로 도와줘도 정리가 어렵다.
랜디 프로스트 미국 스미스대 심리학과 교수가 인위적으로 연출한 저장장애의 1~9단계 수준. 윌북 제공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