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근초고왕 무덤으로 추정되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 3호분. 고구려식 적석총(돌을 쌓아 만든 무덤) 형태인데 왕족 무덤을 다른 귀족들의 무덤과 차별화하기 위해 외래 양식을 썼다는 설이 유력하다. 한성백제박물관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그러나 무덤을 쓴 지 한 세기 만인 475년 근초고왕의 능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갔고 다시 551년에는 신라 땅에 편입된다. 그에 따라 왕릉은 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퇴락하거나 약탈 대상으로 전락했고 또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에 대한 전승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지금도 발굴 중인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군에 근초고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어느 무덤이고 또 그 일대의 옛 무덤 발굴을 통해 새롭게 밝혀진 백제사의 비밀은 무엇일까.
용두사미로 끝난 일제강점기 발굴
한성기 백제 무덤이 다시금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 초반의 일이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이래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석촌리(현 서울 송파구 석촌동) 일대의 백제 무덤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1916년 그 내용을 간략히 공개했지만, 석촌리 일대의 무덤을 왕릉으로 인식하지는 못했다.그 무렵 석촌리 일대에 분포한 무덤은 293기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가운데 석촌리 1호분이 가장 큰 무덤이었다. 야쓰이 일행은 돌을 쌓아 만든 적석총의 구조 및 발굴 방법을 몰랐기에 좁고 깊은 도랑 하나를 팠다가 무덤방이나 제대로 된 유물이 드러나지 않자 서둘러 발굴을 끝냈다. 그 후 이 일대의 백제 무덤들은 총독부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공주나 부여의 백제 무덤들과 달리 보존 조치가 추진되지 않았다.
백제 왕릉이 왜 고구려식 적석총?
석촌동 일대에서 출토된 ①금제 달개 ② 1호분 북쪽 적석총에서 나온 기와류 ③ 12호 목곽묘에서 나온 흑유계수호(닭 머리 모양 검은 항아리). 한성백제박물관·국립공주박물관 제공
기대를 품었던 대형 적석총의 경우 훼손이 심하고 무덤 주인공의 유해를 안치한 무덤방 등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실망하였지만, 지표상에 봉분이 남아 있지 않았던 곳에서 무덤 하부가 잘 남아 있는 사례들이 속속 드러났다. 그에 더하여 대형 무덤의 경우는 주변에서, 작은 무덤의 경우는 내부에서 전형적인 백제 토기와 기와, 황금 장신구, 중국 청자 등이 쏟아짐에 따라 이곳이 한성기 백제 사람들의 핵심 묘역임이 확인됐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3호분이었다. 이 무덤은 돌로 3층의 단을 쌓은 고구려식 적석총이고 길이가 자그마치 50.8m나 되는 대형분이어서 일약 백제 왕릉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조사자는 근초고왕릉으로 특정했다.
석촌동 일대에 고구려식 적석총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두고 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고구려 혹은 부여에서 유력한 세력들이 이주하면서 전해진 것으로 보았고 극단적으로 4세기 무렵 백제 왕실이 북방계로 교체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백제 왕실이 주체적으로 자신들이 여타 귀족들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외래의 무덤 양식을 도입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아졌다.
싱크홀이 불러낸 한성 백제
석촌동 고분군에 대한 발굴은 1987년까지 단속적으로 진행됐다. 그 무렵 대형 묘 발굴이 종료됨에 따라 추가 발굴은 없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15년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그해 석촌동 고분군 내 1호분 북쪽 잔디밭에서 싱크홀이 발생한 것이었다. 조사를 벌인 결과 나무로 만든 현대 지하 구조물이 무너져 내리면서 생긴 구덩이였음이 밝혀졌다.이 조사에서 구덩이 주변으로 돌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한성백제박물관이 실시해 온 이 발굴에서는 새로운 사실이 많이 확인됐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수십 기의 적석총이 연접된 모습으로 드러난 것인데 길이가 자그마치 100m를 넘어선다. 무덤 상부는 대부분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았으나 무덤이 빼곡히 서로 이어져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아마도 혈연적으로 가까운 인물들이 오랫동안 무덤을 이어 붙여 가면서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연접 적석총의 하부에는 더 이전 시기에 만들어진 목관묘와 목곽묘가 분포하며, 연접된 무덤들 중간중간에서는 장송 의례를 거행하던 터가 확인됐다. 그곳에서는 여러 사람분의 화장된 인골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다량의 기와와 함께 화려한 금제 장식품이 출토되기도 했다. 또한 그동안 석촌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기와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도 확보했다. 기왕에는 고구려처럼 적석총 상부에 세운 건물의 지붕에 올려졌던 것으로 보아 왔으나 근래의 발굴 결과로 보면 적석총 주변에 마련된 의례용 건축물 지붕에 올렸을 공산이 커졌다.
이처럼 석촌동 고분군은 한성기 백제사 해명의 ‘일급 사료’이지만 절대다수의 무덤이 제대로 조사되지 못한 채 사라져 아쉬움이 크다. 다만 지난 반세기 동안 상당한 자료가 축적되었기에 그러한 자료를 통해 장차 더 한층 정밀한 연구가 진행되어 여전히 애매하기 그지없는 백제 초기의 역사가 머지않은 장래에 제대로 밝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