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는 생전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말했고 그 예언은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은 1960년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실현됐다.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 제작한 말러의 두상. 동아일보DB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야프 판즈베던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은 1월 25, 26일 공식 임기 첫 정기공연 메인 프로그램으로 말러 교향곡 1번을 택했다. 그는 5년 임기 동안 서울시향과 말러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고 녹음해 음반으로 내놓을 예정이다. 서울시향은 정명훈 전 예술감독과 말러 교향곡 1, 2, 5, 9번을 도이체그라모폰(DG) 레이블로 발매한 바 있다.
오늘날 말러의 교향곡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부터 세계 정상의 오케스트라까지 한때 ‘난해하다’고 알려졌던 그의 교향곡을 레퍼토리에 올린다. 유튜브에서 ‘말러 교향곡’을 검색하면 베토벤의 교향곡보다 많은 영상을 듣고 볼 수 있다. 말러가 베토벤만큼 위대한지는 주관의 문제이지만, 그의 존재에는 베토벤을 넘어서는 복잡성이 있다. 말러는 다차원 입체물 같은 존재가 되었다.
1960년 탄생 100주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불붙은 말러의 인기가 지속돼온 데는 말러가 ‘귀’ 이외에 ‘머리’를 즐겁게 하는, 지적 흥미를 자극하는 인물이라는 점도 작용할 것이다. 당시는 한 세기 앞서 나폴레옹 전쟁을 정리한 빈 회의 이후 억압적으로 안정됐던 유럽사회가 여러 모순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시대였고, 농익은 시민사회의 예술이 약간은 시큼한 발효의 냄새를 풍기던 퇴폐적 ‘세기말’의 시대였으며, 말러는 그런 시대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반영했다.
그것이 실현된 것은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이었을까. 1960년대는 서구가 인류사상 경험해보지 못한 풍요를 최초로 맞이한 시대였다. 한편으로는 그 풍요의 기반 위에 거대한 정신적 공허가 서구를 휩쓸었다. 냉전이 극한으로 치달았고, 인간은 우주에 도전하기 시작했으며, ‘데미안’으로 대표되는 헤르만 헤세와 ‘생의 한가운데’를 쓴 루이제 린저 열풍, 히피 세대의 등장, 대학의 현실참여, 참여적이면서도 쓸쓸한 반전가요의 물결 등이 이 시대를 휩쓸었다.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그의 시대에 번져나간 말러 열풍의 이유를 ‘모순과 복잡성’으로 설명한다. 당시 사회의 서로 대결하는 힘들, 민주주의가 증대하면서도 월남전이 일어나는 식의 모순과 복잡성이 세상에 대해 ‘이중 시각(dual vision)’을 제공하는 말러의 음악과 상응했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시대를 푸는 열쇠가 되었다는 시각이다.
나는 시대가 말러를 불러낸 이유에 대해 ‘모순과 복잡성’ 외에 ‘공허의 충족’을 더하고자 한다. 말러는 현대의 공허를 충족시켜주기 맞춤한 시기에 세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은 이 세상을 새롭고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도록 만들어주며, 삶과 세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주는 면이 있다. 그가 바라본 세계는 비극성과 임무를 부여받은 거대한 드라마로서의 세계이며, 인간의 삶은 이런 세계 위에서 분명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요구받는 것이었다. 그 속에 공허가 있다면, 그것은 채워 충만하게 만들기 위한 공허이자 인간의 능동적인 역할을 요구하는 공허이다.
말러는 이 행성 위에 자취를 남긴 그 누구보다도 세계와 삶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그에게 있어서 세계는 풀어내야 할 의미로 가득한 곳이었고, 개인은 그 의미를 풀어야 하는 과제와 숙명에 붙들린 존재였다. 그가 남긴 수많은 메모와 편지가 그 ‘숙명감’을 증명한다. 어린 말러에게 어른들이 장래 희망을 묻자 그는 주저 없이 “순교자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순교하지는 않았지만 이 아이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늘 몸과 정신을 불태웠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