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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감 도장 사라져도… 70년 손길 쌓인 명장의 작품은 남는다”

입력 | 2024-02-07 03:00:00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인장포’ 발간
인장공예명장 ‘거인당’ 유태흥 씨
“고유서체 새긴 유일한 작품 내놔, 전통 도장 예술 계속 이어나갈 것”
전자서명제도 등장에 쇠락의 길로




5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인장포 ‘거인당’에서 유태흥 명장이 조각칼로 인장을 파고 있다. 디지털 전산화의 영향으로 인장 수요가 줄면서 수제 인장 장인도 얼마 남지 않았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5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인장 가게 거인당. 조각칼을 움켜쥔 유태흥 씨(83)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돋보기를 쓴 유 씨는 자그마한 대추목 도장을 감싼 조각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집중했다. 회전 베어링으로 조각대를 돌려가며 도장 이곳저곳을 신중히 팠다. 5분 정도 지나자 조각칼에 의해 파인 부분이 선명해지며 글자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유 씨는 “3시간 꼬박 작업해야 수제 도장 하나를 완성할 수 있다”며 “고유 서체와 새기는 방식이 적용돼 세상에 딱 하나만 있는 인장”이라고 말했다.

유 씨는 2008년 대한민국 인장공예 명장으로 인정받은 ‘인장 기술자’다.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 등 유명인들의 고급 인장이 유 씨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대다수 인장 업체가 컴퓨터 조각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유 씨는 직접 글씨를 쓰고 새겨 도장을 만든다. 수조각 도장은 컴퓨터로 설정된 서체와 달리 기술자만의 독특한 손글씨가 도장에 새겨진다. 위변조도 어렵고 예술성을 갖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무부터 물소 뿔, 터키석, 상아까지 재료가 다양한데 비싼 수제 도장은 1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최근 거인당 등 서울의 오래된 인장 가게를 소개하는 조사 보고서 ‘서울의 인장포’를 발간했다. 박물관은 2020년부터 낙원떡집, 서울 대장간, 이용원 등 시민생활사를 잘 보여주는 기록물을 발간해 왔다. ‘서울의 인장포’는 네 번째 시리즈다. 보고서에는 일제강점기부터 본격화된 인장 문화의 변천사 등이 담겼다. 1950년대부터 서울에서 활동한 박인당, 거인당, 옥새당, 여원전인방, 인예랑 등 명장에 대한 기록도 포함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과거 인장은 ‘돈이 되는 기술’이었다. 6·25전쟁으로 생긴 피란민 수용소에서 배급을 받으려면 반드시 인장이 필요했고, 학교에서도 입학과 졸업을 하려면 반드시 서류에 인장을 찍어야 했다. 가령 유 씨가 1960년 서울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인장부에 취업했을 때 초봉은 1만2000환으로, 공무원 월급인 4000환보다 세 배 많았다. 유 씨는 치과용 전동 드릴을 활용한 인장 조각기를 고안하고, 진열 샘플용 조각품을 대량으로 제작해 하청 인장포들에 판매했다. ‘인장업의 산업화’를 이끈 것이다.

그러나 인장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최근 행정안전부는 1914년 도입된 인감증명제도를 110년 만에 대폭 축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감증명제도는 도장을 행정청에 미리 신고하고 증명서를 발급받아 본인임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2025년까지 인감증명을 요구하는 사무 2608건 중 인감 필요성이 낮은 사무 82%(2145건)를 정비할 계획이다. 신분 확인만으로 가능한 사무는 간편인증, 전자서명으로 대체하게 한다는 방침이다.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인장포 ‘거인당’에서 본보와 인터뷰 중인 명장 유태흥 씨.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유 씨는 “도장 수요가 줄더라도 명장이 만드는 ‘진짜’는 남아있을 것”이라며 “서운하더라도 도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계속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유 씨의 가게를 이용하는 손님들은 주로 50, 60대 연령층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나 손주에게 선물하는 용도로 도장을 맞춘다. 부동산 계약 등 중요한 금전 거래에 쓰이는 인장을 제 몸처럼 아끼라고 값나가는 수제 도장을 선물하는 것이다. 과거엔 예물 도장을 맞추는 손님들도 있어 카탈로그를 만들기도 했다.

최보영 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인장 문화는 독특한 생활사를 잘 보여주는 데다 전통 예술의 한 부분으로서 계승할 필요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사지원 기자 4g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