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 업계에서 ‘굿즈’는 실패할 수가 없는 상품이다. 모니터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캐릭터를 구현한 피규어나 인형은 물론이고 캐릭터가 그려진 손거울, 담요 등 제품들은 이미 오랜 스테디셀러다. 웹소설⠂웹툰 IP를 활용한 굿즈 시장이 활성화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 지난 5월 서울 영등포구 더현대에서 열린 카카오엔터테인먼트 웹툰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팝업스토어에 방문한 굿즈 구매자 1인당 평균 구매 금액은 50만 원으로 알려졌다.
‘내 새끼’를 위해서라면 삼시세끼 컵라면을 먹는 한이 있어도 기꺼이 지갑을 여는 덕후들은 탐나는 고객이다. 하지만 ‘기꺼이’ 지갑을 연다고 해서 ‘무조건’ 살 것이란 기대는 오산. ‘최애’에 진심인 덕후들은 캐해(캐릭터 해석)*에 실패한 굿즈엔 오히려 혹평을 던진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2023 만화·웹툰 이용자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용자들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굿즈를 주로 구매한다며 굿즈 상품의 활성화를 위해선 품질 개발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단순히 예쁘고 귀엽다는 이유로 열광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 인물을 분석하고, 그가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하는 행위
그렇다면 덕후들이 기꺼이 ‘텤마머니(Take my money)’를 외치게 만드는 성공적인 굿즈는 무엇이 다를까? 브랜더쿠는 덕후들의 취향을 저격한 굿즈를 샅샅이 뜯어봤다.
럽-다이브 할 수밖에 없도록
웹소설·웹툰 덕후들과 일반 팬들이 구분되는 것은 ‘과몰입’의 여부다. 주인공의 시련에 함께 슬퍼하고 주인공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줄 만큼 몰입하는 덕후들을 만족시키는 굿즈는 해당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상태에서 제작돼야 한다. 굿즈에 캐릭터 디자인을 활용하는 것을 넘어 성격과 작품 세계관까지 녹여낼 때에 덕후들을 열광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출처: 텀블벅
네이버웹툰이 지난 2021년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진행한 웹툰 ‘바른연애 길잡이’ 플래너가 대표적이다. 작중 주인공 ‘바름이’는 매일 플래너에 일정을 꼼꼼히 계획하는 전형적인 MBTI J형의 ‘갓생러*’다. 이런 바름이의 모습에 감명 받아 그를 롤모델 삼아 플래너를 작성하는 독자들도 속출했다. 이에 작품 속 바름이가 사용하는 플래너가 실제로 출시된 것. ‘바름생활’을 꿈꾸는 독자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었고 총 2억 4300만 원이 모금됐다.
웹툰 ‘연애혁명’은 지난 3월 10여년 만에 완결을 맺었다. 주인공 ‘왕자림’과 ‘공주영’이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서 졸업하기까지의 서사를 다룬 작품으로 연재 기간 내내 네이버 목요웹툰 조회 수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나도 한번 더 졸업을 하는 기분’이라거나 ‘주영아, 자림아 행복하게 잘 살아’ 등의 댓글이 수두룩할 정도로 작품에 몰입한 독자들도 많다.
출처: 텀블벅
대기업은 왜 펀딩으로 굿즈를 제작할까?
대기업들도 하나 둘 웹소설·웹툰 IP를 활용한 굿즈 제작에 뛰어 들고 있다. 기존 자사 제품의 패키지만 바꾸는 식의 단순한 컬래버는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이제는 제품 기획 단계부터 작가와 협업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출처: 텀블벅
글로벌 SPA 브랜드 스파오는 지난 9월 웹툰 ‘세기말 풋사과 보습학원’의 작가 ‘순끼’와 손잡고 작중 주인공이 입었던 바람막이나 후드티를 재현한 상품을 선보였다. 텀블벅을 통해 공개했는데 1300여 명이 펀딩에 참여해 총 1억 5200만 원이 모였다. 해당 펀딩은 고객 디자인설문조사를 거쳐 1등을 차지한 아이템들을 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덕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제품이 무엇인지 고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이 ‘굳이’ 펀딩으로 굿즈를 제작하는 것이 의아하지 않은가? 그 이유는 덕후를 타깃으로 하는 제품과 서비스는 사전에 판매수량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 있다. 일반 소비자와 달리 덕후들의 연령대, 구매 성향, 구매력 등을 미리 파악하기도 어렵다. 오직 ‘콘텐츠’ 하나만 보고 뭉친 불특정 다수이기 때문이다.
이에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굿즈 제작의 경우에는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출시되는 경우가 많다. 제작 과정에서 소비자들과의 소통을 통해 구성품을 수정하거나 리워드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도 펀딩을 통한 굿즈 제작의 이점이다.
덕심으로'만' 사달라는 건 욕심!
“웹소설·웹툰은 콘텐츠 감상 외에는 덕질 방법이 적어서 어떤 사업을 하든 덕후들이 웬만해서는 반기는 편이에요. 하지만 덕후도 결국은 소비자이기 때문에 품질 이슈나 가격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요. 한 번은 의리로 사더라도 그 이후는 장담할 수 없다는 거죠.”-매달 웹소설 구매에 10만 원 이상을 쓰고 있는 한 모씨(26세)
이쯤되면 웹소설·웹툰 IP를 활용한 굿즈는 ‘무조건’ 성공하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다들 불만은 있지만 ‘일단’ 사는 거 아니냐고 오해할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 덕후들은 콘텐츠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웬만하면’ 콘텐츠 IP를 활용한 굿즈에 호의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황후 캐릭터를 기반으로 한 제품의 마감도가 낮다거나 공부를 못하는 캐릭터를 앞세운 플래너처럼 콘텐츠 이해도가 떨어지는 굿즈에는 호응하지 않는다. 아무리 인기 있는 콘텐츠라고 해도 단순히 캐릭터를 활용했다는 것만으로 구매하지도 않는다.
출처: 와디즈
웹툰 ‘독립일기’는 ‘대학일기’, ‘자취일기’부터 이어진 인기 IP인데도 불구하고 지난해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와디즈’에서 진행한 ‘독립일기 4D 햅틱쿠션’은 펀딩 달성률 0%라는 처참한 실적을 기록했다.
앞선 작품들의 장르는 일상툰인만큼 컵, 담요, 슬리퍼 등 작품에서도 흔히 등장하고 등장인물 ‘자까’가 활용할 법한 제품에 대해서는 수요가 높은 편이다. 그러나 햅틱쿠션처럼 독자들에게도 낯설고, 콘텐츠와 연관성을 찾아보기 힘든 제품에 대해서는 호응이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덕후들이기에 제품의 품질·가격을 신경쓰지 않고 무작정 지갑을 열 것이라는 지레짐작도 금물이다. LG생활건강과 인기 웹소설 기반 웹툰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이 지난달 공개한 컬래버 프로젝트는 펀딩 하루 만에 팬들의 항의로 중단됐다.
폭리 논란이 주효했다. 주인공이 사용한 립 제품에 다양한 스티커, 손거울 등이 포함된 패키지를 14만 5000원에 판매했는데, 패키지에 포함된 화장품이 LG생활건강 온라인몰에서 1~2만 원 대에 판매되고 있었던 것이다. 함께 구성된 굿즈도 캐릭터 디자인을 입힌 것외에 색다를 게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해당 프로젝트는 구성품과 가격을 수정해서 추후 다시 진행될 예정이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덕후이기 이전에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를 사고 싶은 똑똑한 소비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터비즈 조지윤 기자 georg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