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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돼서야 할 수 있는 특별한 작품”

입력 | 2024-02-09 01:40:00

영화 ‘소풍’ 투톱 김영옥-나문희
“우리들 이야기 잔잔하게 그려내
아프고 거동 못하는 불행 대처 못해”
존엄한 마무리 고민하는 모습 담아



영화 ‘소풍’에서 고향 친구이자 사돈 사이인 은심(나문희·왼쪽)과 금순(김영옥)이 고향 경남 남해의 오솔길을 걷고 있다. 나문희는 “이번 작품은 연기를 했다기보다 카메라에 대들었다. 이 나이가 돼야 표현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고 말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현역 최고령 여배우’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김영옥(87)의 자세는 꼿꼿하고 눈빛은 형형했다. 계단을 힘겹게 내려오며 중얼중얼 볼멘소리를 했지만 질문이 잘 들리지 않자 일어서서 직접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그의 ‘최애’인 가수 임영웅 이야기를 할 때면 야문 입매에 미소가 번졌다.

나문희(83)는 자리에 앉자마자 노래를 흥얼거렸다. “머리 손질받다가 생각이 났다”며. 특유의 웃음소리가 금세 장내를 환하게 밝혔다. 지난해 12월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해 묻자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 가사를 말했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순수한 사랑, 나는 그런 꽃을 한 번 피워 본 것 같아요.”

삶의 끝자락에서 ‘존엄한 마무리’를 고민하는 노인들의 모습을 그린 영화 ‘소풍’이 7일 개봉했다. 배우 김영옥과 나문희가 ‘80대 여배우 투톱’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두 배우를 이날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라기보다 그냥 흘러온 우리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그리지 않았나 해요. 제일 중요한 건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있는 건강이겠죠. 아프고 거동을 못 하게 될 때의 불행은 대처할 길이 없다는 걸 영화에서 보여주지 않았나 합니다.”(김영옥)

김영옥은 ‘소풍’에서 평생 밭일을 하며 가족들을 돌본 금순 역을 맡았다. 연로한 금순은 허리가 말을 듣지 않아 점점 아침에 몸을 일으키기 어려운 날이 많아진다. 아직 걸을 수 있을 때 금순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16세 때부터 가까이 지낸 고향 친구이자 사돈지간인 은심(나문희)을 만나러 상경한다. 돈이 궁해진 아들이 은심의 집을 팔자고 찾아온 날, 두 사람은 훌쩍 고향인 경남 남해로 돌아와 소풍 같은 시간을 보낸다.

김영옥은 드라마, 영화 등 총 2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자타가 인정하는 ‘일중독’이다. 같은 날 개봉한 영화 ‘도그데이즈’의 배우 윤여정이 그를 롤모델로 꼽았다. 그는 “황감하다”며 67년 동안 연기를 한 원동력에 대해 “자아도취”라며 웃었다. “거절해야지 하다가도 대본을 읽으면 미친 사람처럼 ‘이건 해야겠구나’ 해요. ‘내가 안 하면 다른 사람은 이거 표현 못 할걸’ 하는 오만도 있고요.”

그런 김영옥에게도 ‘소풍’은 80대 후반이 돼서야 할 수 있는 특별한 작품이었다. 그는 “배우로서 영화에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다루는 ‘존엄사’에 대해 “이제는 좀 (공개적으로) 다루면 좋겠다. 의료 행위로만 삶을 끌고 있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문희도 ‘소풍’과 여러모로 인연이 깊다. 그와 20년 넘게 일한 매니저의 아내가 각본을 썼고, 절친 김영옥과 함께 출연하기 위해 5년을 기다렸다.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지난해 영화를 찍는 동안 남해와 부산에서 묵었는데 그사이 남편의 건강이 악화됐다. 남편은 영화 촬영이 끝나고 7개월 뒤인 지난해 12월 세상을 떠났다. 나문희는 “영감을 보면서 많이 느꼈다. 아픈 몸으로 한없이 누워 있는 지옥으로 사람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 회복이 힘들 때는 연명 치료 없이 해방됐으면 한다”고 했다.

나문희는 “이제 영감도 없고 날개를 달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연기하다가 죽어도 되는 팔자”라고 농담했다. 63년을 연기했는데 여전히 “하면 할수록 요술봉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하며 눈을 반짝였다. “‘소풍’은 길고 힘든 인생과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그저 카메라가 (그 현실을) 보여줬을 뿐이에요. 모든 할머니들이 주저앉지 말고 자꾸 많은 걸 시도해 보면 좋겠습니다.”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