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8월 동부 독일의 타넨베르크에서 독일군은 침공해 온 21만의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포로만 9만5000명이었다. 이 포로들의 모습은 러시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나중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는 단초가 되었다.
이 회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였다. 누가 진정한 공로자인가를 두고 8군 참모장 호프만 대령의 공이라는 설도 있고, 힌덴부르크는 별로 한 일이 없고 루덴도르프가 다 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 승리는 팀으로 이룬 승리였다. 최고 사령관으로서 힌덴부르크는 절대 허수아비가 아니었다. 루덴도르프의 대담한 기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의 역할을 정확히 찾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초급 장교 시절부터 기동과 지휘관의 자율성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공통의 전략적 목표 아래 각 지휘관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프로이센의 전통적 신념과 이를 계승한 그나이제나우, 몰트케에 대한 확실한 신봉자였다. 당시 67세의 노령이었지만, 전략적 사고는 전혀 낡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의 반동으로 타넨베르크와 힌덴부르크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더욱 높아졌다. 이 인기로 1925년에 힌덴부르크는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힌덴부르크의 극적인 몰락이 시작된다. 대통령으로 그는 영리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았다. 그의 최악의 실수는 히틀러의 후원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히틀러가 쿠데타 실패로 체포되었을 때 관대하게 대했다. 나중에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힌덴부르크는 왜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급속히 팽창하는 공산당을 억제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설도 있다. 총리 임명 전에 나치는 이미 제2당이 되어 있었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