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는 직접적 관련 없는 참고 사진.
“차례상 간단하게 차리자더니…”
기혼 여성들이 모인 지역 커뮤니티에서는 설 연휴가 끝난 뒤 명절 관련 이야기가 쏟아졌다. 이 가운데 단연 공감을 산 것은 “올해도 또 속았다”는 게시글이었다. 결혼 8년차라고 밝힌 40대 여성 A 씨는 “시가에서 올해 설 차례상은 간소화해서 차리자고 하시더라. 그 말을 믿은 내가 바보”라며 “차례상에 올릴 음식만 반나절 동안 만들었다. 이번 명절에도 또 속은 것”이라고 푸념했다. 게시글에는 “간소화 이야기가 제일 무섭다” “그 말에 매년 속는 사람 여기도 있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예법 지침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르면 차례는 설과 추석 등 절기가 찾아온 것을 조상에게 알리기 위해 예(禮)를 올리는 간단한 의식이었다. 이에 전통적으로 차례상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주자가례에는 차례상에 술 한 잔, 차 한 잔, 제철과일 한 쟁반만 올리도록 돼 있다”며 “지금은 차례상이 제사상과 뒤섞이고 (친척 등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나눠먹는 우리나라 정서까지 적용되면서 풍요로운(과한) 차례상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기제사처럼 많게는 20여 가지 음식을 차리는 것을 고집하는 집안도 여전히 많은 것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이런 차례상을 찍어 올리며 #차례상간소화는언제쯤 #차례상간소화는먼얘기 #차례상간소화했음좋겠다 등의 해시태그를 사용한 이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22년 9월 진행된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의 차례상 간소화 기자회견.
특히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은 상황에서 음식을 과하게 차리는 것에 대한 불만도 상당하다. 지난 7일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올해 설 차례상 차림비용은 평균 30만9641원으로 나타났다. 결혼 후 처음으로 명절을 지냈다는 30대 여성 B 씨는 “과일을 잘 먹지도 않는데 바리바리 싸주시는 바람에 처치 곤란"이라며 “선물 세트라면 당근(마켓)에 내놓기라도 할 텐데 차례용으로 쓰느라 윗부분을 깎는 바람에 나눔도 안 될 것 같다. 4~5가지 과일을 한꺼번에 구매해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리게 되는 게 아깝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남성들도 비용 부담 등을 이유로 차례상 간소화를 외치는 상황이다. 이전에는 주로 차례상을 직접 차리는 여성들이 육체·정신적 고통을 토로했지만 젊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음식 가짓수가 과한 차례상에 대한 거부감이 일고 있는 것이다. 결혼 3년 차라고 밝힌 남성 C 씨는 “부모님 용돈에 왕복 주유비(차비), 음식 차리는 비용, 설에는 조카들 세뱃돈까지 들어가니 족히 100만 원은 쓰고 오는 것 같다”며 “다른 것에서 줄일 수 있는 게 없으니 차례상을 간소화해 음식 차리는 비용이라도 줄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미영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은 “차례상을 간소화한다는 말 자체도 틀린 것”이라며 “‘차례상의 원형을 복원한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 ‘되돌린다’고 말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차례상 원형 복원을 위해 ‘가족간의 협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꼽았다. 김 위원은 “제례 문화는 결혼·장례 등과 달리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행사이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의 결속을 다지는 장치로 잘 활용할 수 있다”며 “시어머니와 며느리 등 여성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가족 협의하에 새로운 차례상 룰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