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과 직거래, 韓에 빚 독촉 ‘예고된 게임’ 동맹 일변도 벗어나 완충외교 모색할 때
이철희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주 KBS 대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집권할 가능성에 어떻게 대비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지난해 방한했던 미국 상원의원단 얘기를 꺼냈다. 미 의원들이 ‘대통령은 바뀌어도 의회는 그대로 있다’고 하더라며 “미국의 대외 기조가 그렇게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동맹을 더 강화하고 더 업그레이드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이지 큰 저기(차이)는 없을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동맹국의 9개월 뒤 대선 이후를 거론하는 부담을 가급적 피하면서 나름의 기대를 담아 모범 답안을 내놓은 것이리라. 다만 그 답변은 대통령 탄핵의 혼란 속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트럼프 1기를 맞았던 7년 전의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정부 관계자들도 미국 하원 방한단의 얘기를 이렇게 전했다. 미 의원들이 “선거 땐 말이 거칠어지는 법”이라며 별일 없을 거라고, 심지어 한 공화당 의원은 “트럼프를 잘 가르칠(educate) 테니 염려 말라” 했다고.
하지만 트럼프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트럼프의 한마디 한마디에 세계가 화들짝 놀랐다. 동맹국 정상들은 트럼프의 막말과 변덕, 기행에 혀를 찼다. 트럼프 재집권 경보에 벌써 국제사회가 긴장하는 이유다. 이미 겪어봤다지만 결코 익숙해지기 어려운 트럼프의 2기는 더욱 끔찍할지 모른다. 1기 때만 해도 참모진의 난색과 사보타주로 미뤄진 경우도 있었지만 충성파 참모들로 채워질 2기 땐 브레이크도 없이 폭주할 공산이 크다.
트럼프가 복귀한다면 한반도 정세에도 격변을 불러올 것이다. 트럼프 2기 국무장관 1순위로 거론되는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최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북한은 물론 중국, 러시아에도 최대치의 제재를 가해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것이라고 자신했다. 대북 ‘최대 압박과 관여’의 재가동, 즉 전쟁 일보 직전의 ‘분노와 화염’ 공세에 이어 김정은과의 브로맨스 외교 쇼를 다시 연출할 수 있다는 기대인 것이다.
트럼프는 그간 우크라이나 전쟁의 ‘24시간 내 종결’을 장담해 왔다. 푸틴과는 우크라이나 휴전을 거래하면서 북-러 무기 거래를 끊게 하고, 중국에는 관세 폭탄을 퍼부으며 시진핑에게 대북 압박을 종용하고, 김정은에겐 거친 말 폭탄과 함께 옛 러브레터를 꺼내 들고 손짓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김정은이 협상에 나온다면 한때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한국은 철저히 소외되는 북-미 직거래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한국의 동맹 비용을 놓고도 주판알을 튕길 것이다. 이미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5배 증액을 요구했던 트럼프다. 그에겐 한국도 만성 체납국 중 하나일 뿐이다. 방위비 분담금은 물론이고 한미 연합훈련과 전략자산 전개, 나아가 대북 핵우산 전력 유지 비용까지 청구서 항목에 포함시키려 할 것이다.
트럼프가 몰고 올 혼란은 이미 우리 문 앞에 닥친 야수와 같다. 트럼프 한마디에 공화당 의원들이 초당적 ‘안보 패키지’ 법안을 좌초시켰고, 친트럼프 방송인이 푸틴에게 침략을 정당화하는 궤변을 늘어놓게 멍석을 깔아줬다. 많은 나라가 안보에서 미국 의존도를 줄이려는 자강(自强)의 노력, 운신의 폭을 넓히는 전방위 완충외교로 트럼프 리스크에 대비하고 있다. 한국도 동맹만 바라보는 관성적 사고부터 벗어나야 전략과 방책이 보인다.
이철희 논설위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