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를 영화로 읊다]〈75〉 꼭두각시를 두고 읊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피노키오’에서 피노키오(왼쪽)는 무솔리니 앞에서 그를 똥쟁이라고 야유하는 공연을 한다. 넷플릭스 화면 캡처
인형극에 사용되는 인형을 괴뢰(傀儡·꼭두각시)라고 한다. 당나라 양굉(梁鍠)은 꼭두각시 공연을 본 뒤 다음과 같이 읊었다.
시에서 읊은 나무 꼭두각시는 노인 형상만 빼고 본다면 피노키오를 연상시키는 점이 있다. 카를로 콜로디가 쓴 ‘피노키오’의 원제도 ‘어느 꼭두각시 인형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피노키오에 관한 다른 시각의 영화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피노키오’(2022년)가 있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색다른데, 감독이 앞서 연출한 ‘악마의 등뼈’(2001년)나 ‘판의 미로’(2006년)처럼 알레고리를 통해 파시즘의 야만성을 폭로한다. 영화 속 독재자 무솔리니는 피노키오가 자신을 전쟁광 똥쟁이라고 희롱하는 내용의 공연을 보고 격분한다. 피노키오는 불의한 전쟁에 꼭두각시처럼 이용되길 거부한다.
예나 지금이나 꼭두각시란 말은 남의 조종을 받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은 이 시를 이어받아 우리네 삶도 인형과 같아서 다른 사람의 조종을 받으며 덧없이 떠돈다고 읊었다.(‘題前定録贈李伯牖’) 영화 속에서도 파시스트 시장이 줄도 없이 움직이는 피노키오에게 누가 조종하냐고 추궁하자 피노키오는 그런 당신은 누가 조종하냐고 되받아친다.
원작에서 피노키오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사는 것에 지쳐서 착한 소년이 되고 싶어 한다. 소년이 된 피노키오는 자신이 꼭두각시였을 때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는지를 돌이켜보며 이제 누구에게도 조종받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반면 시인은 꼭두각시를 서글프게 바라보며 세상이란 줄에 매달려 조종당하다 버려진 덧없는 인생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