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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 메디컬 리포트]하루 환자 100명 보던 의사, 10명만 봐도 되나

입력 | 2024-02-15 23:36:00

정부가 27년 만에 전국 의과대학 입학 정원 확대 방침을 밝히면서 의사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대형병원에선 전공의들의 사직서가 이어지고 있고 의대와 의학전문대학원 재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뉴스1


‘이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2등급도 의대를 지원할 수 있게 됐다’, ‘제주도에선 수능 성적이 없어도 의대에 보낼 수 있다고 한다’, ‘강원도로 이사 가면 의대를 보다 쉽게 보낼 수 있다더라’….

올해 고3이 되는 수험생 자녀를 둔 부모 사이에서 가장 큰 이슈는 단연 의대 증원이다. ‘의대 입학정원 2000명 확대’ 발표는 이처럼 의료계뿐 아니라 교육계에서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입시보다 중요한 건 국민의 생명이고, 연간 2000명씩 추가로 배출되는 의사들이 필수의료 분야로 유입돼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2년 전 서울아산병원 간호사가 병원 내에서 뇌출혈로 쓰러졌지만 ‘개두술’을 할 의사가 없어 사망한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며 열악한 필수의료 상황을 그대로 보여줬다. 뇌수술을 하는 신경외과 의사는 신경외과 의사의 10%에 불과하며, 머리를 여는 수술인 개두술이 가능한 의사는 전국에 113명뿐이다. 그중에도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는 신경외과 의사들이 대부분 힘들고 개원을 못 하는 뇌 분야보다 개원할 수 있는 허리디스크 등 척추질환 분야를 택하기 때문이다. 또 2017년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 때 소아과 의사들을 구속한 것(모두 무죄)은 가뜩이나 적은 필수의료 지망자를 더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실제로 그 사건 이후 소아과 지원율이 격감한 것이다. 지난해 신생아에게 뇌성마비 장애를 입혔다고 산부인과 의사에게 12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 사건 역시 산부인과 지원을 줄게 만들었다.

반면 비급여 영역인 도수치료에 대한 실손보험 적용은 수많은 정형외과 마취통증의학과 외과 의사들이 개원을 택하게 했다. 도수치료는 의사 처방전만 있으면 받을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실손보험에 가입한 환자들은 부담 없이 도수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의사들의 새로운 수익원이 되면서 곳곳에 통증 클리닉이 생겨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서울의 한 척추관절 병원에선 정형외과 전문의를 구할 수 없어 최근 원래의 두 배에 가까운 연봉을 내걸기도 했다. 또 서울아산병원에선 지난해에만 마취통증의학과 의사 12명이 사표를 냈다. 이들은 대부분 도수치료를 포함해 개원을 했거나, 개원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피부 미용 역시 의사들이 몰리고 있는 대표적인 비급여 분야다. 비보험 미용시술 위주의 연구를 하는 대한레이저피부모발학회는 2021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회원이 5000명에서 1만 명으로 2배가 됐다. 신규 회원 중 70%는 피부과가 아닌 다른 과목 전문의였다. 비보험 비만 치료 의사도 넘친다. 비만 치료만 하는 병원 중에는 한 달 매출액이 수십억 원인 곳도 있다.

매일 쉬지 않고 급여 위주의 환자들을 진료하는 의사들이 비급여 분야에서 쉽게 돈을 번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사명감만으로 유혹을 뿌리치긴 어려울 것이다. 정부는 이달 초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발표하며 이 같은 현실을 바꾸겠다고 했지만 대부분 선언적인 내용이거나 검토해 보겠다는 수준으로 구체적인 조치는 아직 안 나온 상태다.

정부가 발표한 의대 2000명 증원에 대해 의사단체들은 대체로 부정적인데 그 이유 중 하나도 망가진 필수의료의 현실을 바꿀 대책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대 증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온 대한민국의학한림원도 정책의 선후를 합리적으로 조정해 달라는 입장을 밝혔다. 필수의료 및 지역의료 붕괴는 잘못된 보건의료 정책의 결과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학한림원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시기 ‘코로나19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국민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알렸던 신뢰도 높은 단체다.

전국 의대에선 교육의 질이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입학 정원이 크게 늘었을 때 필요한 교육자와 교육 시설을 수개월 만에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는 의학 교육의 질을 담보하기 위한 대안도 가능한 한 빨리 내놓아야 한다.

외국에서 부러워하는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지금까지 필수의료 분야 의사들이 하루에 100∼250명의 급여 환자를 보며 희생하면서 지탱해 왔다.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의료 시스템의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에게 돌아간다. 국민들이 바라는 건 2035년까지 1만 명의 의사가 늘었을 때 지금처럼 ‘3시간 대기 3분 진료’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번을 계기로 정부가 의료계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선진국처럼 필수의료 분야에서 환자에게 30분 이상 충분히 설명해도 병의원이 운영되는 시스템을 만들어 주길 간곡히 요청한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lik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