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사과 안 한 명품백, 대통령의 한계 보여줘 지지율 별개로 국민 마음속 신뢰 많이 잃을 것 신뢰 회복하려면 공천 독립성 끝까지 보장하고 가족 관련 문제 재발 방지책 확실히 마련해야
이기홍 대기자
필자가 이 칼럼에서 쓰는 ‘국민’이라는 표현은 전체 국민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가상의 스펙트럼상에서 극좌를 1, 극우를 10으로 놓았을때 3~8 사이 정도의 사람들을 문장 분량 축약을 위해 그저 ‘국민’이라 표현한다.
지난주 윤 대통령의 KBS 대담은 윤석열이라는 지도자에 대한 국민 평가의 변곡점이 될 것이다. 시험시간은 종료됐다. ‘김 여사 명품백 사건’은 막을 내렸다. 국민은 각자가 매긴 평가표를 서랍장에 넣었다. 더 기대도 주문도 안 할 것이다.
사건이 사라지거나 잊혀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대통령실은 문제가 일단락됐다고 진단하겠지만 이는 반만 맞다. 진솔하게 사과했으면 일회성 전시품처럼 사라질 사소하고 별 함의 없는 사건을, 끝내 사과 없이 봉합해버리는 바람에 전시장 구석의 영구 전시 박제처럼 고형물이 돼 버렸다. 꺼내지 않은 채 봉합한 환부 속 작은 거즈처럼 두고두고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럼에도 국민이 주시했던 것은 윤석열에게 표를 주면서 기대했던 ‘법과 정의, 상식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고 내로남불과 이중잣대가 사라진 세상’을 향해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다가섰는지를 측량해 볼 잣대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실과 여당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사과하면 그때부터 2막이 시작돼 더 물고 늘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략적 마인드의 기본조차 결여된 주장이다. 평소엔 중도층과 지지층을 중심에 두고 정책을 결정하면서 왜 이럴 때는 오로지 극좌파만 염두에 두고 대책을 결정하나?
윤 대통령은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넘어서지 못했다. 필자가 의견을 듣는 온건 보수층 중에는 국정 방향이 옳다고 여겨 여전히 지지하지만 그래도 예전 검찰총장 시절처럼 인간적 신뢰는 가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다.
지지율의 등락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국민 마음속 신뢰자본의 약화다. 지지율은 사안이나 이벤트에 따라 등락을 거듭하지만 신뢰자본은 쉽게 복구하기 어렵다.
대통령의 신뢰자본이 약화된 상태에서 만약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지율은 20%대에서 정체되고 내각이 말을 안 듣고 여당마저 대들 것이다. 경제 컨트롤도 어렵고 대외관계에서도 힘을 받지 못할 수 있다. 설령 야당운이 좋아 총선 승리를 거둔다 해도 위에 열거한 악몽의 시나리오는 시간적으로 다소 유예될 뿐이다.
윤 대통령은 최근 민생토론회 등 민생 국정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민생토론회 행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준비는 실무진이 한다고 해도 대통령 스스로도 엄청난 양의 학습과 준비가 요구된다. 그런 열정과 성실성이 쌓여 가면 국민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당장의 신뢰자본 회복을 위한 경로는 두 가지다. 첫째는 가족 관련 문제는 법무부 등 해당 부처에 독립성을 보장해 맡기고, 재발방지책을 확실히 마련하는 것이다. 박성재 법무장관 후보자는 13일 명품백 사건에 대해 “검찰에서 원칙과 법에 따라 공정하게 수사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이 발언이 실행되도록 독립성이 보장되면 신뢰는 조금씩 돌아올 것이다. 동시에 대통령실은 특별감찰관 임명 등 제도적 정비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둘째, 공천과 총선 후 개각에서 더 이상 내 사람 챙기기는 없음을 실증하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국힘 공천은 일각에서 우려했던 ‘용산 천하론’을 기우로 돌린 채 청신호가 켜졌다.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강남 공천을 신청했던 이원모 전 비서관이 험지 출마로 발길을 돌리겠다고 한 것은 대통령실이 공천 독립성을 존중해주고 당도 균형감 있게 결정해 가고 있다는 시그널을 준다. 만약 또 다른 핵심 측근인 주진우 전 비서관도 본인이 신청한 해운대갑 대신 격전지로 뛰어들고, 해운대에는 윤 대통령이 부산 민생토론회에서 강조했듯 경제 과학기술 분야 인재가 전략 공천된다면 국힘 공천은 근래 여당 공천사에서 보기 드문 독립 공천으로 기록될 싹이 보인다. 당 장악 논란으로 훼손됐던 신뢰도 상당히 회복될 것이다.
더 나아가 총선 뒤 있을 대규모 개각에서 ‘검사군단’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윤 정부 중반기는 전반기에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아가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