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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밭에서 피어난 청춘의 삶과 사랑

입력 | 2024-02-20 03:00:00

‘오키쿠와 세계’ 21일 국내 개봉
작년 ‘日영화 베스트 10’서 1위
에도 최하층민 흑백영상에 담아



영화 ‘오키쿠와 세계’에서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딸 오키쿠(구로키 하루·왼쪽)와 똥지게꾼 추지(간 이치로)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 엣나인 필름 제공


“자네, 세계(世界)라는 말을 아나?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이 ‘세계’에서 당신이 가장 좋다고 말해줘.”

‘세계’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대, 일본 최하층민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 영화 ‘오키쿠와 세계’가 21일 개봉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 등을 제치고 지난해 제97회 키네마준보 ‘일본 영화 베스트 10’ 1위에 오른 작품이다.

영화는 19세기 일본 에도시대 말기이자 근대화가 목전에 있던 때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배경으로 한다.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외동딸 오키쿠(구로키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빈민가에서 산다. 어느 날 복수의 결투에서 아버지가 목숨을 잃고, 오키쿠는 목소리를 잃고 만다. 오키쿠의 곁에는 똥지게꾼 추지(간 이치로)가 있다. 에도에서 나오는 분뇨를 농가에 가져다 파는 추지는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천한 신분이지만 오키쿠를 향한 마음을 키워간다. 그의 동료 야스케(이케마쓰 소스케) 역시 온갖 괄시를 받지만 언젠가 이야기꾼이 되겠다는 꿈을 품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간다.

일본의 베테랑 감독 사카모토 준지가 처음으로 도전한 흑백 시대극이다. 그는 분뇨를 밭에 뿌려 작물을 키우고, 그 작물이 식탁에 오른 뒤 또다시 분뇨가 되는 에도시대의 독특한 ‘순환 경제’에 대해 다뤄보고 싶었다고 한다. 동시에 오키쿠와 추지, 야스케를 통해 빈곤 속에서도 주어진 인생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내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풀어냈다. 그는 “팬데믹을 거치며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최하층의 사람들이 차별받으면서도 지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봤다”고 했다.

흑백 스크린에 담긴 오키쿠 역의 배우 구로키 하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에 그림 같은 초승달 눈썹, 군더더기 없는 눈빛은 흑백 영화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야마다 요지 감독의 영화 ‘작은 집’으로 제64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일본 최연소 여우주연상(은곰상)을 받은 실력파 배우다.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