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와 유럽의 NPT 모범 준수국들이 언제라도 핵 보유할 능력과 의지 보여줘야 푸틴 시진핑 트럼프의 核 불장난 막고 역으로 집단안보 최후 보루 NPT 지킨다
송평인 논설위원
국제 관계의 대전환을 이룬 것은 우드로 윌슨이다. 윌슨 이전만 해도 약소국은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 희생돼도 상관없는 장기판의 졸이었다. 이런 상황이 비난을 받기는커녕 칭송을 받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5년 러일전쟁을 끝내는 포츠머스 조약을 중재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 조약의 제1조가 조선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루스벨트를 탓해봐야 소용없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였다. 당시의 평화란 다른 모든 걸 제쳐두고 강대국끼리 전쟁을 안 하는 상태를 의미했다.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승전한 후 국제 관계를 재편하면서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대신에 민족자결(national self-determination)과 집단안보(collective security)를 이념으로 삼았다. 세력균형은 강대국의 약소국 나눠 먹기에 불과하고 기껏해야 일시적인 평화만 보장할 뿐이었다. 윌슨은 약소국의 자결을 보장하고 그 위에서 강대국들이 영구적인 평화를 모색하는 집단안보를 추구했다. 그것은 무기의 현대화로 대량살상이 가능해진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약소국들은 이상주의자 윌슨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집단안보의 모색은 약소국들에 독립의 길을 열어줬다. 우리나라도 뒤늦은 수혜자다. 그러나 영구적인 평화는 너무 원대한 꿈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후 처리 실패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고,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나자마자 냉전(冷戰)으로 이어졌다. 냉전의 실질적 내용은 한국전쟁에서 우크라이나전쟁까지 이어지는 약소국에서의 열전(熱戰)이었다.
재선에 도전한 도널드 트럼프가 북핵을 사실상 인정하고 대북 지원의 대가로 핵 동결-축소-폐기를 유도하려 한다. 핵 보유국이 자발적으로 비보유국이 된 적이 없어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더 심각한 것은 트럼프가 북핵 용인을 핵 억지력 제공 비용과 결부시키는 상황이다. 물론 한국과 일본은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더 이상 미국의 피와 돈만으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의 핵 억지력 실행에 대한 의구심이 항존(恒存)하는 상황에서 억지력의 대가가 지나치면 차라리 자체 억지력을 갖는 것이 낫다. 북한과 같은 불량국가가 아니라 NPT를 모범적으로 준수해온 한일이 핵무기를 보유한다면 집단안보의 최소한의 구속복이 완전히 풀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트럼프의 불장난을 막으려면 핵무기를 가질 수 있음에도 갖지 않은 나라들이 언제라도 핵무기를 개발할 준비가 돼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한일만이 아니라 트럼프가 탈퇴로 협박하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NPT는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 러시아 중국에 핵 보유의 특권을 부여한 체제인데도 러시아와 중국은 북한의 핵 개발을 제지하기는커녕 방치하고 이제는 노골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특권을 부여받은 나라로서 무책임하기 짝이 없을 뿐 아니라 스스로의 이익에도 반한다. 다만 두 나라가 한 어리석은 짓을 깨우쳐주기 위해 러시아와 중국에 가까운 곳에 핵무기를 재배치해야 할 때 미국이 안이한 판단으로 하지 않았고 결국 북핵의 현실화로 이어졌다.
핵 강대국들이 집단안보를 위한 최소한의 의무라도 이행하도록 하려면 핵 비보유국들이 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다. 자체 핵무장 능력도 갖추지 않고 핵무기 재배치도 거부하는 한가한 자세로는 국가의 안위도, 세계의 안위도 지키지 못한다. NPT를 모범적으로 준수해온 나라들이 NPT를 넘어설 각오까지 해야 NPT가 가까스로 지켜질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